**
보잉 747이 한 송이의 젖은 꽃처럼 유유히 바다를 향해 떨어진다. 나는 속으로 1초라도 빨리 정신을 잃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나는 중력을 그대로 느낀다.
나는 위로 젖혀진 고개를 억지로 옆으로 돌려 김형태 교수를 바라본다. 그는 반쯤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졸린 것처럼. 그의 턱을 주먹으로 갈기고 싶지만, 압력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라이스 대학에서 열릴 강연에 동행할 조교가 필요하다는 그의 제안을 거부하기만 했다면, 자유낙하하는 알루미늄 박스 안에서 의식을 잃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어차피 자네는 취직도 힘들고, 방학 때 시간 같이 보낼 애인도 없지 않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는다. 비행기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무한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블루 라군]에 나올 것 같은 백사장에 누워서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팔을 움직여 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도 본다. 모래와 물이 느껴진다. 아프지 않다. 나는 몸을 일으킨다. 나는 놀랍도록 멀쩡하다. 옥스포드 셔츠에 찢긴 자국 하나 없다.
이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잘 정돈된 해변이 보이고, 해변을 따라 늘어선 비치 베드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봤던 휴양용 오두막들이 눈에 들어온다.
리조트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멀리서 작지만 확실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나는 말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걸어간다. 백사장을 빠져나와, 모래 위에 놓인 목재 산책길을 따라 작은 오두막들이 원형으로 모여있는 곳으로 나아간다. 모퉁이를 돌자,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 사이에 김형태 교수도 있다.
그들은 거대한 쓰레기산 같은 것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내가 바닷물을 흘리며 다가가자, 김형태 교수가 눈썹을 으쓱 거리며 나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호오. 자네도?”
그 의뭉스러운 표정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갑게 느껴진다. 그에게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거대한 쓰레기산의 정체가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의 일부분이다. 일식집에서 나오는 생선 구이처럼, 비행기의 일부분이 툭, 잘려 나와 땅 위에 널브러져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들을 본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그대로 속의 것들을 모두 게워 낸다. 바람이 불자 비행기 잔해로부터 시큼한 냄새가 퍼져 나온다. 나는 더 이상 뱉어낼 것이 없을 때 까지지 헛구역질을 계속한다. 다들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나는 그들의 발치에도 동일한 구토 자국이 있는 것을 본다.
비행기 잔해가 크게 한 번 덜컹 거린다. 그리고 의자에 묶인 채로 사망한 노인의 몸이 두 조각으로 찢어지며, 그 사이에서 침팬지가 등장한다. 이브다.
이브는 표정이 없고, 한 손에는 줄이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있다. 그의 털은 비해이 기름과, 자신의 것이 아닌 피로 젖어 있다.
“아쉽지만 기내에도 작동하는 통신기기가 없군요. 아무래도 우리는 무인도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이브가 말한다.
"자, 다들 모여 보세요. 우선 규칙을 정합시다."
사람들은 대답이 없다.
“무리에는 리더가 필요한 법입니다. 다들 [혹성탈출] 보셨죠?”
나는 머릿속으로 시저가 곤봉으로 샌프란시스코 경찰관의 머리에 풀스윙을 날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내일 오전에, 여기 이 광장을 10바퀴 도는 달리기를 합시다. 거기서 1등 하는 사람, 혹은 침팬지가 우리 생존자 무리의 대장이 되는 겁니다.”
침팬지는 손가락으로 광장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상자 더미를 가리킨다. 찢어진 박스 틈새로 오레오 봉지가 보인다. 그리고 그는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말한다.
“다들 아시겠지만, 대장의 말은 절대적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토하기 시작한다.
“이거라도 마셔 둬.”
누군가가 내게 물병을 건넨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보인다. 나는 물병보다, 놀랍도록 티 없이 맑은 그 손가락을 본다. 도나의 손가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