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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만화가 Nov 23. 2024

[단편소설] 사랑을 위한 달리기

통합본

**

도나(Donna)의 원래 이름은 돈(Don)이다. 돈 마르티노. 그녀는 모델로서 받은 첫 계약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 그녀에게 남자 이름을 지어준 조부모를 고소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파벳 몇 개를 누락시켰다고 사람을 쇠창살 뒤에 집어넣을 수는 없더라고.”


도나 마르티노가 말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내 옆에 누워 있다. 그녀와의 관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짧게 끝났다.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나는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침대를 박차고 나가거나, 혹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말없이 바라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아시안들은 언제나 금방 끝났어. 뭐, 나는 그게 싫지는 않아.”


내가 그녀의 말을 곱씹는 사이에 그녀는 어느새 내 옆을 파고든다. 그녀의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난다. 분명 내가 쓴 것과 같은 샴푸인데도, 그녀에게서 나는 향은 더 자극적이다. 졸음을 달아나게 만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 역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아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녀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있다. 나를 바라봐 주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다. 도나는 오래된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서나 나왔을 법한 나른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녀의 혀 끝에서 침을 머금은 습한 공기가 휘몰아친다. 아직 그녀를 알게 된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도나 마르티노의 목소리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되었다.


도나 마르티노의 이야기는 현실과 과거를 넘나 든다. 그녀는 자신이 자랐던 시칠리아 남부의 풍경을 묘사한다. 드넓은 올리브밭. 언제나 화요일이 되면 해안선을 따라 운행되던 오래된 관광용 범선.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던 미국인들. 손그늘을 만들어 시칠리아 소녀들을 지긋이 응시하던 관광객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찍어 미국의 모델 에이전시들에 뿌렸다. 뉴욕의 한 회사에서 답장과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녀는 비행기 티켓을 정중히 거절하고, 포르투갈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뉴욕으로 갔다. 도나는 유럽과 미국을 오갈 때 언제나 배를 탄다.


“혹시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영화 본 적 있어?”


그녀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 ‘잠깐’이라고 말하고, 영화의 줄거리를 묻는다. 도나는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호화 크루즈선에 탄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비료를 팔아 돈을 쓸어 담은 동유럽 재벌. 사회주의에 심취한 선장 (스크린 내에서는 위대하지만 침대 위에서는 그렇지 못한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다). 그리고 머리가 빈 것처럼 나오는 모델 커플 한 쌍.


“모델만큼 영화에서 속 편하게 그리기 쉬운 직업도 없을 거야.”


나는 도나 마르티노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나의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덮고 있는 마호가니 나무 구조물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전혀 아시안 같은 느낌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또 한 번 그녀의 말을 곱씹는다. 내가 말을 채 소화시키기도 전에 그녀는 영화에 대한 묘사로 돌아간다.


재벌과 선장, 모델 커플이 탄 배가 해적의 공격을 받는다. 배는 침몰하고, 살아남은 한 줌의 사람들은 태평양 (혹은 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무인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도나 마르티노의 말을 멈춘다. 잠깐만요. 지금 우리 상황이랑 너무 비슷한 것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녀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나는 영화의 엔딩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그녀는 내게 그 이유를 묻는다. 나는 ‘그러는 편이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신의 오른쪽 검지로 내 손바닥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나는 그녀의 제스처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둔 도나 마르티노의 핸드백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준다. 도나 마르티노가 웃는다. 그리고 이번에는 1초 정도 나를 바라보아 준다.


도나 마르티노는 내가 내 비밀을 하나 말 해 주면 영화의 엔딩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15분 전까지 동정이었다고 고백한다. 관계는커녕 키스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여자 손을 잡아본 것도 집 근처 카페에서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차일 때 자리를 뜨는 그녀의 손 끝에 내 손톱이 스친 것 밖에 없었답니다.


도나 마르티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비밀이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을 포함해서 왕형제, 김형태 교수, 제프 베일린과 그 빌어먹을 침팬지 새끼까지도 알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대꾸한다. 도나 마르티노는 그런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고 응수한다.


나는 침울해진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도나 마르티노의 옆에 앉는다. 도나 마르티노는 자신의 배를 내 등에 밀착시키고, 전자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내 척추의 돌기를 하나하나 건드린다.


“동정이건 동정이지 않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시칠리아의 올리브밭에서 흙놀이를 할 무렵부터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 동정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들 중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녀의 말이 위로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다.


**

우리는 그렇게 잠시 말없이 시간을 보낸다. 도나 마르티노는 애플민트 향이 나는 전자담배를 피운다. 나는 도나 마르티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대로 우리가 구조되지 못해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취업 같은 건 이제 고민 축에도 끼지 못한다. 내일 아침에 있을 달리기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오로지 도나 마르티노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봐 주며, 다시 입을 맞추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도나 마르티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이탈리아어로 욕을 내뱉는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게 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안해. 갑자기 그 침팬지 새끼 생각이 나서.”


나는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그럴 때는 씨발이라고 말하세요. 씨이 바아알.”


“씨이 바아아알.”


도나 마르티노가 내 말을 따라 한다. 그리고 뜻을 묻는다. 나는 아주 아주 안 좋은 한국말이라고 대답한다


“그 침팬지 같은 놈들한테 어울리는 말이에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상반신을 나를 향해 돌린다. 나는 또 정신이 아득해진다.


도나 마르티노는 그 침팬지 새끼가 링컨 메모리얼 광장에서 버락 오바마와 악수를 할 때부터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침 나는 그때 휴가를 받아 시칠리아로 돌아가 있었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봤지. 할아버지는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했어. 침팬지가 사람이랑 악수를 하다니!  게다가 이름이 ‘이브’가 뭐람. 누가 봐도 수컷임에 분명한… 두툼한 알주머니를 달고 있으면서.”


남편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토를 달고 보던 도나의 할머니는 ‘저 침팬지가 당신 같은 멍청한 사람보다는 100배는 똑똑하다’며 남편에게 시비를 걸었다. 사소한 말다툼은 싸움으로 이어졌고, 도나는 그날 휴가를 취소하고 다시 미국행 배를 탔다.


도나는 내게도 그 영상을 봤는지 묻는다. 나는 생중계는 보지 못했고, 나중에 다큐멘터리에서 영상 클립을 봤다고 대답한다.


“다큐멘터리?”


“네. KBS… 그러니까 한국의 BBC 같은 곳에서 만든 이브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러면 그것도 형편없었겠네.”


나는 다큐멘터리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떠올린다. 미학적으로는 형편없었지만, 몇몇 장면들은 충격적이라는 상투적인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했다. 특히 이브가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어눌한 교포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인간, 그리고 침팬지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네. 정말 형편없었어요.”


내가 동의하자 도나 마르티노가 활짝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치아는 희고 고르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이가 하얗게 반짝일 수 있는지 신기하다. 그리고 그녀의 날숨에서는 민트 향이 난다.


그녀는 전자 담배를 바닥으로 집어던지고 다시 눕는다. 그리고 이불 한쪽을 열어젖히고는 내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그녀의 옆에 눕는다.


이제 그녀는 천장을 보고 있지 않다. 옆으로 누워 나를 마주 보아준다. 그녀의 눈동자 색은 파란색과 초록색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혹성탈출이 인간들을 병들게 했어.”


그녀가 말한다. 도나 마르티노는 모든 곳이 아름답다. 목소리부터 귓불에 난 솜털까지. 무엇보다도 그녀의 온도. 도나 마르티노의 몸은 서늘하지만, 손 끝은 깜짝 놀랄 정도로 뜨겁다. 그녀는 말을 반복한다.


“혹성탈출이 인간들을 병들게 했다니깐… 침팬지가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지지연설을 하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녀의 가슴이 내 갈비뼈에 와서 닿는다. 시공간이 두 피부가 닿는 그 지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누워 있지만,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봐. 내 말 듣고 있어?”


네, 네. 듣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녀의 가슴이 시공간의 블랙홀로 작용한 순간부터의 기억이 없다.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뱉는다.


“다시 말할 테니깐 똑바로 들어.”


애초에 비행기 조종간을 침팬지에게 맡기는 것이 말이 되냐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건 추앙하고 싶지만,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고의로 반박을 한다.


“차라리 네가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


빈 말이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나는 도나 마르티노에게 입을 맞춘다. 입이 맞닿은 채로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민트향이 입속으로 들어온다.


확률은 절댓값일 뿐, 부호를 갖지 않는 법이다. 기장과 부기장이 동시에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안내 방송을 들었을 때, 김형태 교수는 ‘호오’라고 감탄을 터뜨리며 이 건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희박한 확률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무슨 헛소리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옆에 누워 있는 도나 마르티노를 보면, 교수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

비행기에서 벌어진 대혼란 속에서, 이브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승객들의 울음과 비명소리를 한 번에 잠재우는 짐승 소리가 기내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1등석으로 연결된 계단을 타고, 제프 베일린의 안내를 받으며 이브가 천천히 우리들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느님 맙소사. 이브잖아? 이브가 여기 타고 있었어? 오 하느님. 어쩌면 살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이브는 따뜻하게 데워진 기내식이 들어있는 서빙 카트 위에 서서,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호모 사피엔스들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걱정 마세요 ‘인간’ 여러분. 항공기 조종의 기본 원리는 제가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천재 침팬지 이브는 샌프란시스코 발 도쿄행 비행기의 조종간을 잡게 되지만, 실상 그는 단지 말하는 침팬지일 뿐 천재 유인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비행기는 그대로 추락했다.


**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녀에게 무언가 다정한 말을 해주고 싶다. 나는 도나 마르티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손가락 사이를 흐르는 물처럼 빠져나간다.


“밤이 되니깐 역시 꽤 쌀쌀하네.”


그녀는 내 말을 흘려보낸다.


나는 그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바지를 입고 오두막 밖으로 나간다. 바다 위에 놓인 나무다리 옆으로 동일한 모양의 캐빈 여덟 개가 열매 열리 듯 달려 있다. 모두 불이 켜져 있다. 잠이 든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나는 가장 가까운 오두막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왕 씨 형제 중 첫째가 문을 열고 나온다.


“무슨 일?”


“혹시 이불 남는 것이 있나 해서요.”


“우리는 두 명이라 남는 게 없어.”


“아, 그렇죠.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으려고 하지만, 그가 문을 잡고 버틴다.


“혹시 그 여자랑 같이 있어?”


“그 여자요?”


“그래, 그 여자.”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누구긴 누구야? 그 빌어먹을 침팬지 새끼 꼬봉을 빼면, 여기에 여자는 한 명뿐 이잖아. ”


“아, 그분이요? 아니요. 저는 몰라요. 어디서 달리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듯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한 손으로 정수리를 벅 벅 긁는다. 그리고 빵, 쓰같은 짧지만 된소리가 잔뜩 담긴 중국어 욕을 내뱉는다.,


“진짜 달리기 하려나 내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잠시 침묵한다. 나는 우리가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생존자나 물자를 찾아야 한다며, 비행기 잔해를 뒤지는 이브. 이브의 손끝에서 육포처럼 찢겨나가던 시체.


“가볼게요.”


나는 그를 남겨두고 뒤돌아선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왕 씨 둘째가 왕 씨 첫째에게 중국어로 무어라 말을 한다. 왕 씨 첫째는 내가 자신의 캐빈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닫는다.


다음 캐빈으로 간다. 문이 열려 있다.


열린 문 너머로 과자를 뜯어먹고 있는 김형태 교수가 보인다.


“과자가 있으셨어요?”


“어. 아까 주웠어.”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려나?”


김형태 교수는 관심 없다는 듯 과자를 주워 먹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이불을 좀 얻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 알아서 가져가.”


나는 테라스 쪽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이불과 시트지를 벗겨 든다.


“과자도 몇 개 가져가도 될까요?”


“그래 그래.”


김형태 교수가 오레오 두 봉지를 내 손에 쥐어준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다.


“내일 어떻게 될까요?”


“달리기 말이니?”


“네, 달리기요.”


“달리겠지.”


김형태 교수는 남의 일인 것처럼 심드렁하게 말한다.


“교수님도 달리실 건가요?”


김형태 교수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평생 달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다.”


“그래도 내일은 달리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괜히 이브 눈 밖에 났다가는 어떤 꼴이 될지 모르니까요.”


김형태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마 걱정해 주는 거니? 고맙구나.”


그리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웃어 보인다.


“여하튼, 좋은 시간 보내거라.”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캐빈을 빠져나온다. 어쩐지 속이 답답하다.


도나 마르티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다. 한쪽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맞이한다.


“자기 혹시 스노우 패트롤이라고 알아?”


“스노우 패트롤이요?”


“응. 영국 밴드.”


“처음 들어봐요.”


“정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도 꽤 유명한 편인데… 돌아가면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해야겠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애정의 잔향을 느끼고 코를 찡긋거린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과자 이야기를 꺼낸다.


“과자를 좀 얻어왔어요.”


좋은 소식이라며 그녀가 활짝 웃는다. 나는 이불을 그녀 위에 한 겹 더 덮어 주고, 그녀에게 오레오를 내민다. 그녀는 과자를 받아 들고 유심히 보더니,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다. 나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으니 그녀에게 다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녀가 다시 웃는다.


“고마워. 내일 달리기 시작하기 전에 먹고 힘낼게.”


“달리기 정말 할 거예요?”


나는 생수병을 뜯으며 묻는다. 다행히도 섬에는 생수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응. 기왕 하는 거 일등 해야지.”


도나 마르티노는 운동회를 앞둔 소녀 같은 표정이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타히티 리조트로 신혼여행을 온 사람 같다. 해발 10km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물 한 통을 한 번에 다 비운다. 그나마 물이 풍족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안 먹어도 괜찮아?”


도나 마르티노가 되묻고, 나는 정말 괜찮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이다. 오후에 그 장면을 본 이후로는 전혀 식욕이 돌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 내 생각에는 내가 제일 빠를 것 같으니깐.”


도나가 말한다. 그리고 두 손을 뒤통수에 괴며 미소를 짓는다.


“내가 이기면 너를 부대장으로 임명해 줄게.”


얼굴이 붉어진다. 혈류가 몸의 곳곳으로 도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만약에 그녀와 평범하게 만났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중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을까?


**

보잉 747이 한 송이의 젖은 꽃처럼 유유히 바다를 향해 떨어진다. 나는 속으로 1초라도 빨리 정신을 잃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나는 중력을 그대로 느낀다.


나는 위로 젖혀진 고개를 억지로 옆으로 돌려 김형태 교수를 바라본다. 그는 반쯤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졸린 것처럼. 그의 턱을 주먹으로 갈기고 싶지만, 압력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라이스 대학에서 열릴 강연에 동행할 조교가 필요하다는 그의 제안을 거부하기만 했다면, 자유낙하하는 알루미늄 박스 안에서 의식을 잃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어차피 자네는 취직도 힘들고, 방학 때 시간 같이 보낼 애인도 없지 않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는다. 비행기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무한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블루 라군]에 나올 것 같은 백사장에 누워서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팔을 움직여 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도 본다. 모래와 물이 느껴진다. 아프지 않다. 나는 몸을 일으킨다. 나는 놀랍도록 멀쩡하다. 옥스포드 셔츠에 찢긴 자국 하나 없다.


이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잘 정돈된 해변이 보이고, 해변을 따라 늘어선 비치 베드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봤던 휴양용 오두막들이 눈에 들어온다. 


리조트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멀리서 작지만 확실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나는 말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걸어간다. 백사장을 빠져나와, 모래 위에 놓인 목재 산책길을 따라 작은 오두막들이 원형으로 모여있는 곳으로 나아간다. 모퉁이를 돌자,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 사이에 김형태 교수도 있다.


그들은 거대한 쓰레기산 같은 것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내가 바닷물을 흘리며 다가가자, 김형태 교수가 눈썹을 으쓱 거리며 나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호오. 자네도?”


그 의뭉스러운 표정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갑게 느껴진다. 그에게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거대한 쓰레기산의 정체가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의 일부분이다. 일식집에서 나오는 생선 구이처럼, 비행기의 일부분이 툭, 잘려 나와 땅 위에 널브러져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들을 본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그대로 속의 것들을 모두 게워 낸다. 바람이 불자 비행기 잔해로부터 시큼한 냄새가 퍼져 나온다. 나는 더 이상 뱉어낼 것이 없을 때 까지지 헛구역질을 계속한다. 다들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나는 그들의 발치에도 동일한 구토 자국이 있는 것을 본다.


비행기 잔해가 크게 한 번 덜컹 거린다. 그리고 의자에 묶인 채로 사망한 노인의 몸이 두 조각으로 찢어지며, 그 사이에서 침팬지가 등장한다. 이브다.


이브는 표정이 없고, 한 손에는 줄이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있다. 그의 털은 비해이 기름과, 자신의 것이 아닌 피로 젖어 있다.


“아쉽지만 기내에도 작동하는 통신기기가 없군요. 아무래도 우리는 무인도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이브가 말한다.


"자, 다들 모여 보세요. 우선 규칙을 정합시다."


사람들은 대답이 없다.


“무리에는 리더가 필요한 법입니다. 다들 [혹성탈출] 보셨죠?”


나는 머릿속으로 시저가 곤봉으로 샌프란시스코 경찰관의 머리에 풀스윙을 날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내일 오전에, 여기 이 광장을 10바퀴 도는 달리기를 합시다. 거기서 1등 하는 사람, 혹은 침팬지가 우리 생존자 무리의 대장이 되는 겁니다.”


침팬지는 손가락으로 광장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상자 더미를 가리킨다. 찢어진 박스 틈새로 오레오 봉지가 보인다. 그리고 그는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말한다.


“다들 아시겠지만, 대장의 말은 절대적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토하기 시작한다.


“이거라도 마셔 둬.”


누군가가 내게 물병을 건넨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보인다. 나는 물병보다, 놀랍도록 티 없이 맑은 그 손가락을 본다. 도나의 손가락이다.


**

“앉아 있지 말고 조금이라도 자 둬.”


도나 마르티노의 목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도나 마르티노의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내 상반신과 하반신을 감싸고 있다. 화장실 입구에 걸어 두었던 아로마 향초가 꺼진다. 생각만큼 어둡지는 않다. 달빛과 별빛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그대로 캐빈 안으로 스며 들어온다.


“새벽 2시쯤 된 것 같아. 파도 소리로 알 수 있어.”


도나 마르티노의 목소리가 구명 튜브처럼 느껴진다. 내가 밑으로 가라앉을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붙들어 준다.


잠시 선잠이 든 모양이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가 뒤섞인다. 떨어지는 비행기. 이브의 손에서 찢어지던 노인의 피와 뼈. 침팬지의 안내에 맞춰 차례차례 배정된 숙소로 들어가던 사람들. ‘그냥 심심해서’ 라며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도나 마르티노.


“왜 달리기로 리더를 정하자고 했을까요?”


내가 묻는다.


“뭔들 어때?”


그녀가 대꾸한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지만, 이제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제가 내일 이겨볼게요.”


나는 말한다. 말하고 나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인지한다.


응? 뭐라고? 도나가 되묻는다.


“도나는 걱정 말고 자요.”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도나라고 불러본다.


“대체 뭘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요.”


그녀가 웃는다. 기쁨의 웃음이라기보다는, TV에서 놀랍고 신기한 동물을 보았을 때 터뜨리는 웃음이다. 나는 그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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