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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ong Oct 15. 2023

퇴사작정기#8 일론2: 일의 슬픔과 고통과 진절머리

일은 일이라서, 결국 아픔과 슬픔과 모멸을 동반한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수록작 중 ‘일 년’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일을 끝내고 운전해서 집으로 갈 때면 스물일곱밖에 되지 않은 자신이 다 늙어버린 노파 같았다. 입사하기 전의 삶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고, 그 때의 자신은 온전히 남처럼 기억됐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그 많은 시험을 통과해서 도착한 곳이 간척지 공사장, 자신에게 소리치는 사람들 앞이었다....’(p.90-p.91)


소설의 주제나 맥락과 상관없이 나는 아주 오래도록, 이 문구 앞에 서있었고 또 한참을 서성였다. 단물이 다 빠질만큼 그만둘까라는 질문을 곱씹고도 한참 지나서야 퇴사를 작정한 마음이 잘 드러나서였다. ‘일하기 전의 내가 온전히 남처럼 여겨져서’ , 그러다가 결국 그 마음이 삶에 대한 실망과 냉소로까지 이어져 그만두기로 작정하거나 그만두기까지 한 거였으므로.

나는 여전히 퇴사작정중이었고  m은 퇴사 후 다음 일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달라진 현실에 m은 방향은 잃었다.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우리가 생각하는 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이란 대체 뭘까.
일이란... 도대체 뭘까.
도대체 일이 뭐길래……


일은 나라고 말하기엔 나에게 너무 가혹한 것만 같고(그렇게 단순하고 냉정하고 간단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삶이라 말하기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었다. 삶은 매일 여덟 시간씩 쏟아 붓는 일을 하는 과정과 장면보다는,,,가끔 가는 여행의 한 장면과 그 감정의 크기가 더 크게 기억하니까. 그렇다고 일은 별게 아니라고 그저 돈벌이의 수단이라고 말하기엔.... 일은 너무나 많은 영향을 내게 미친다. 어쩌면 큰 기억과 감정은 아니지만 하루에 수십번씩 내 기분을 널뛰게 하고 스트레스와 기억과 생각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 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촘촘이 나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대개,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일한다. 일에 대해 준비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합치면 더 길 것이고, 일이 많은 날은 하루의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일로 채워지니 하루를 온전히 채운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주말의 한 시간이, 잠깐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가, 식사 후의 삼십분의 산책이 나를 살게 하고 나라는 자아를 선명하게 하기도 하겠지만 결국 엄청난 나의 생을 쓰는 건 ‘일’인 거다. 그건 눈에 선명하게 보이게든 보이지 않게든 나에게 스며들고 침전해서, 그것들은 ‘내’가 된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바라보는 시선 위에, 일의 안경이 한 겹 덧씌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예를 들면, 문득 차를 타고 도로를 지나며 멀리 산을 보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거다. 겹겹이 산들의 채도가 달라보이는 이 사진을 찍어 미술 수업을 할 때 거리에 따른 명도 채도에 대해 말해주면 좋겠다, 하고. 삿포로에 가서 눈 때문에 세로로 길쭉하고 납작하게 생긴 신호등을 보면서 환경의 영향을 받은 구조물이라고 말해주면 자연환경이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하겠구나 하는 거다. 게다가 어딜 가든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하는 건 학교다. 여기에 학교가 있네. 와 저긴 운동장이 잔디로 되어 있네. 와 저 학교는 크다, 작다. 나도 모르게 일의 회로가 수없이 생겼고 그건 나를 구성하는 부품 중에 엄청난 용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내가 무의식 중에 하는 모든 생각이 일과 연결되어 있는 거다. 그만큼 일은 사실 나라는 사람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일은 나라고 말은 못해도 아주,, 많은 부분을 구성하고 나라는 세계를 만들고 지탱하고 있단 거다. 그 시간이 길수록 더더욱.


그래 그러니까 일은 중요하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퇴사작정을 하고 또는 퇴사를 하고 우리는 다음 일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계획을 틀어지고 한참 이야기하다보니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일은 일이라서, 결국 아픔과 슬픔과 모멸을 동반한다. 동반할 것이다.

아무렴 산다는 게 그렇듯이. 기쁨은 반드시 슬픔을 동반하고, 사랑은 상실을 동반하듯이. 모든 고통을 피하고자 하면 삶이 불가능하듯이 일의 슬픔과 고통, 진절머리를 피하고자 한다면 일을 하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아무리 가치롭고, 나의 열심히 성과로 이어지는 일이래도 결국 그 일이란 것도 좌절감을 안겨줄 거고 나를 고통스럽게 할 거란 이야기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마냥 좋은 일이란 없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음으로 건너간대도, 제대로 일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또 다시 우리는 매일매일 푸념하면서, 또 무작정 탈출을 꿈꾸며 살게 되지 않을까.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 빼고는 모두 좋은데, 걸리는 ‘이것’이 있는 사람은 위험한 선택이라고 했다. 그보다는 내가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견딜 수 있는 단점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함께 삶을 함께하기에 좋은 배우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고)

일도 그런 것 같다.


일도, 그러니까 일의 슬픔과 고통과 진절머리도 내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단점을 가진 일이어야 한다.


모든 일이야 힘들지만, 슬프고 고통스럽고 때론 진절머리가 나지만.... 그래도 각 일이 갖는 단점도, 단점의 스펙트럼도 다를 거다. 나와 잘 맞는 단점을 가진 일을 선택해야 다음 일로 건너가서 정말로 퇴사를 잘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그 일에선 단점을 견디다 마음이 닳고, 좀 때가 묻어도 이전의 내가 온전히 남처럼 여겨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오랜 시간과 공을 들이면 적어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까지는 할 수는 없어도 견딜 수 있고 그래도 끌어안을 수 있는 단점을 가진 일을 찾아보자.


우리는 다음 일에 대한 결론은 그랬다. 아주 희미하지만 조금은 방향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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