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막는 사연들 여섯 번째 이야기
"그런데, 역사학과분이 여길 왜 지원하셨죠?"
사실 공모전의 수모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그 뒤로 공모전이라는 걸 참여조차 하지 않았으니. 몇 번의 실패인가? 생각해보면 브런치에 쓰는 글들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우울했던 기억들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성공이라는 애가 좀 태어나야 실패도 엄마가 될 수 있는 거다. 이런 실패의 반복으로 우울해질 대로 우울해져 버린 내 모습을 보고 전에 학교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형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야 너도 좀 맨날 집에서 인터넷만 하고 그러지 말고 동아리 가서 사람 좀 만나라"
"아 사람 만나는 거 좋지. 근데 뭐 이게 나같이 대학교 3학년인 애들도 받아주는 데가 있나?"
"없지. 하지만 좀 찾아보면 스터디 위주로 스펙 쌓기 좋은 학술동아리는 비벼볼 만할 거다"
3학년으로 복학하면서 경영학을 복수 전공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영학 수업을 많이 듣게 될 테니 경영학과 학생들이 많이 듣는 학술동아리를 찾아다녔다. 투자동아리, 경영전략 동아리, 마케팅 동아리 등 여러 곳이 있었다. 문제는 이것도 스펙 경쟁이라고 다들 학술동아리 하나씩 들려고 하니 뽑을 사람은 한정되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늘었으니 이것도 경쟁률이 있다는 것이다.
동아리 면접장에서 나는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들어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갖고 있는 재료로 적절히 포장하여 셀링 하는 건 기본이다. 내가 군대에서 작전병을 하며 PPT를 2년간 만들었다는 점, 회계사 공부를 1년간 하여 재무제표 분석을 할 줄 안다는 점, 최근 공모전 준비를 해보았다는 점은 면접장에서 어필하기 충분했다. 물론 이 세 가지를 한 꺼풀만 걷어내 봐도 얼마나 얕은 경험이고, 볼품없는 것인지 확인이 가능하지만, 면접장에서는 별달리 증명할 수단이 없었기에 어필하기 쉬웠다. 더군다나 같이 지원했던 지원자들은 이제 군에서 갓 복학한 2학년 아닌가,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건 경영학과에서 1년간 새내기 친구들과 놀았다는 것, 군대를 이제 막 다녀왔다는 것 말고는 딱히 그들의 소개를 포장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겐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전공이 문제였다. 명분이 필요했다. 역사학과 전공 학생이 복수전공을 하는 시기에 맞춰 경영학 학술동아리에 지원한다면 동아리 순수 목적보다도 다른 불순한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닌가. 가령, 경영학과 친구를 만든다던가, 이를 통해 2년간의 경영학과 생활을 편하게 해보고 싶다거나 할 수도 있었으니. 물론 그런 것도 없지 않았지만, 내 목적은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여기서 제대로 전략 컨설팅 갈고닦아 실력을 키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역사학과인데 다른 재미있는 동아리도 있을 텐데 굳이 경영 쪽 학술동아리에 왜 지원하셨나요?"
"우선, 지금 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와서 제대로 배우고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CPA를 공부하셨다는데, 다시 회계사 시험 보러 간다고 하면 저희는 1년을 운영해야 하는데 어떡하죠?"
"돌아가는 다리는 불살랐습니다. 1년은 좋은 경험으로 발돋움할 디딤판이지 돌아갈 고향이 아닙니다"
"나이가 다른 지원자보다 많은 부분은 어떻게 저희가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는 재수하면서 한 살, CPA 공부하면서 휴학으로 한 살 어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내 실제 나이 생각해가면서 먼저 앞서 나간 친구들과 같이 하려고 아등바등하려고 조바심내고 싶지 않습니다. 같이 있는 2살 어린 동생들과 친구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지내려 합니다."
사실 이런 인성면접보다 여기서 많이 보는 것은 로지컬 싱킹, 게스티메이션 이런 걸 많이 보는데 보니까 서울의 타이어는 모두 몇 개인가, 신촌점 스타벅스 하루 매출은 얼마인가 같은 논증 추론 문제 해결이 더 중요했다. 다행히 준비를 했던 부분이기도 하지만, 마침 같이 면접장에 들어온 친구가 많이 못해준 덕분에 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덕분에 학술동아리에 들어왔고 1년을 정말 재밌게 보낸 것 같다. 본격적으로 취준을 시작하면서 필요한 게 학점, 토익, 대외활동, 동아리, 공모전이 있다고 하는데 가장 쉽지만 오래 걸리는 동아리로 스펙 쌓기를 시작했다. 학술동아리에 들어간 이후로 1년은 집에 일찍 가질 못했다. 평일에는 동아리에서 주는 과제 준비하고, 주말에는 발표한다고 금요일마다 밤을 새우거나 밤늦게까지 장표를 찍어댔다. 토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동아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 덕분에 1년 동안 훈련은 많이 되었다.
여름엔 보통 다음 신입기수 선발을 위한 준비를 하기 때문에 별로 만나지 않거나, 따로 HBR자료들을 보면서 공부를 했는데, 우리는 기수장이 자기 친구 펜션을 컨설팅해주자고 제안해와서 여름에는 펜션 재개장 프로젝트를 해보면서 아주 재밌는 경험을 했다. 자칫 스펙 쌓는다고 여름방학을 또 자격증이나 어학 공부한답시고 허송세월 할 뻔했는데 아주 알차게 보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바쁘게 보냈지만 이뤄놓은 게 없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매우 소중했던 경험은 내가 이 기간 동안 우울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보통 일상적인 우울에 빠지는 패턴은 비슷하다. 바쁘게 일하고, 휴식을 하면서 혹은 안정화에 돌입하면서 슬슬 루틴에 빠지면서 자꾸 다른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럼 보통 자기를 돌아보면서 무얼 제대로 안 하고 있었는지 반성도 하고 고민도 하면서 벽에 부딪힐 때 우울함이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면 우울이 생길 틈조차 없다. 물론 난 이게 장기적으로 부정적이라고 생각은 드나 단기적으로, 특히 시험에 떨어져 위축되고 자신감이 부족할 때 현실에 몰아넣어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든 좋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다.
학술동아리를 들어오면서 나에게 생긴 좋은 경험, 스펙들을 나열해보자면,
- 좋은 친구들 : 1년을 6명의 남자가 함께 땀냄새 맡으며 보낸 시간들은 서로를 매우 돈독하게 만들어줬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만나고 서로 격려해주고 있다. 모두 서로 다른 사연으로 만난 사람들이지만 결국 모두 잘 풀렸다는 훈훈한 이야기
- PPT 스킬 : 이곳은 PPT스킬을 가르치는 곳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장표를 꾸준히 만들어야 했기에 빠르게 PPT 다루는 숙련도가 올라왔다. 난 이게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이걸 자기 계발하겠다고 하면 절대 이 정도 못할 텐데 함께 1년을 해오는 조원들과 주말 발표를 위해서 만든다고 생각하면 빚지는 마음에 빠르게 이쁘게 정갈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수준이 올라온다.
- 사고의 확장 : 인문학 전공에만 있을 때의 커뮤니티와 다르게 확실히 정반대(?)의 포지션에 가보니 사고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어디가 옳고 편협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다른 집단에서 사람들과 지내보면 얼마나 우리가 서로를 적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의식해왔는지 경험할 수 있다.
바쁘게 1년을 달렸다. 그리고 칼을 간 복수혈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1년 전 내게 실패를 안겨준 항공사 공모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