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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워커비 Mar 13. 2020

존경하는 정치인을 묻는 면접관

퇴사를 막는 사연들 여덟 번째 이야기 

 모 유통사 면접은 존경하는 정치인을 묻기로 유명하다.


 이 회사를 좋아해서는 아니고, 졸업 후 유통업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어서 마트, 백화점 등을 영위하는 국내 대기업 유통사들을 모두 썼었다. 그중에서 당시 초봉 4.000을 맞춰주는 곳이 별로 없었는데, 이 중 종교색채가 강하기로 유명한 모 대기업에서 겪은 취업 과정은 주변 사람들에게 쏟아내고도 남을 스토리들만 있다. 그래서 퇴사를 막는 사연들에서 꼭 다루고 싶었던 이야기기도 하고.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군지 말해보세요


 이미 질문 자체가 틀렸다. 존경할만한 정치인이 있는지부터 물어봐 야한 것 아닌가? 뭐 그런 답변은 할 수 없고. 워낙 이 회사 면접 수준이 이렇게 떨어진다는 건 인터넷에서도 유명하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서류 합격자들끼리 취준 카페에서 답들을 정하곤 했는데 주로 나온 정답은 '이명박'이었다. '보수'고 '기독교'의 교집합이라 이 기업의 지향성과 매우 비슷하니까. 근데 다들 국내 '보수' 혹은 '기독교' 정치인을 말할 텐데 나도 굳이 그렇게 비슷하게 답변하면서 무색무취가 되기 싫어 좀 색다르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준비한 정치인은 '케네디'였다. 

 

쿠바 미사일에서의 케네디 외교술에 대한 답변을 기대했다.


 왜 케네디였냐하면, 면접관들의 형편없는 질문 수준을 일순간에 높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정치인을 답변하면 진부한 보수냐 진보냐에 대한 물음, 노조 결성에 대한 질문들을 해댈게 뻔한데 서로 답정너인 면접 너무 수준 떨어지지 않나. 차라리 케네디를 끌고 온다면, 쿠바 사태 당시 케네디의 유연한 외교 방식에 대해서 풀어낼 수 도 있고, 이걸 오프라인 지점에서 고객들과 갈등 접점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에 대해서도 풀어낼 시나리오들이 생기니 딱딱 맞지 않는가.


 다른 면접자들이 '전두환(실제로 있었다.), 김영삼, 이명박, 이승만' 등 주로 보수&기독교 성향이 겹치는 인물들을 답변하고 나서 내 차례가 되었다. 약간 졸리는 건, 한국 정치인들을 모두 차분하게 얘기하다가 갑자기 외국 정치인 말하려니 너무 어색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케네디 대통령이라고 대답을 하고 나니 면접관들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생각했던 시나리오는 이게 아닌데..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어서 왜 케네디인지 물어봐야 하는데?


이 중에 그들이 원하는 답이 있다.



우리는 외국 정치인 잘 모르고, 한국 정치인, 대통령으로 말하세요


 아니 무슨 하... 진짜.. 질문 수준 하고는...

 

 "대통령들은 제가 경험해본 게 몇 명 안돼서 존경까지는 어려울 것 같고요. 유시민 전 장관의 책들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정치할 때는 미숙한 사람 같았지만 책은 참 재밌게 잘 쓴다는 생각입니다. 정치인들 중에 재미있고 호감이 있다라면 유시민 전 장관이 그 대상은 될 것 같습니다."


 "유시민이라면, 노무현 대통령 쪽이겠네요?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하나요? "


 "음.. 뭐 네 그 당시 노무현 정부의 장관을 했지만, 그것이 제가 존경하는 정치인이나 대통령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호불호냐라고 물으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대해서 호는 맞습니다"


 "그럼 존경하는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인 거네요"


 피하고 피하려고 해도 그냥 이들이 원하는 답변은 '보수냐 진보냐' 이걸 따져 묻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 안타까운 것은 그래 봐야 그 면접을 참여하는 면접관이나 피 면접자들이나 어차피 열심히 근로소득 창출해서 살아가는 서민일 텐데 왜 그리 정치성향을 궁금해하냐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거 나눈다고 자기 소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나? 


 이런 거지 같은 면접을 본 회사는 애초에 종교색채, 정치 색채가 강하기로 유명해서, 한 때는 인적성 시험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의 궁극적인 책임은 정부와 검찰에 있는가'에 대해 묻고 나서 논란이 일자 사과까지 했던데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계속 면접에서도 이런 면접 행태를 이어나가고 있는 걸 보면 기업 기조 자체가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 회사의 면접 형태는 이 외에도 놀라운 점이 있는데, 1차 면접을 합격하고 나서 2차 면접을 보려면 약 5일간의 되지도 않는 근무를 한다는 점이다. 채용조차 되지 않았지만, 회사를 나와서 2차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회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 회사의 단기 근무 이야기는 다음화에서 써보도록 하자


식전 기도를 하고 밥먹는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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