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 펜으로 쓴다. 생각나는 대로.
생각은 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덩어리로 툭툭 떨어진다.
그걸 펜으로 선을 그려 연결한다.
생각이 정리된다고 느낀다. 막힌 곳이 뚫린 기분이다.
뜨거운 국을 먹으며,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며 “시원하다!”라고 외치는 것과 닮았다. 왜 그럴까?
지금의 초중고등학생들 역시 여전히 펜과 종이로 공부한다.
내 우측 가운데 손가락 끝 마디와 손톱 옆은 펜을 오래 쥐어 눌러 생긴 자국으로 여전히 움푹 들어가 있다.
이 흔적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세대, 그 이전 세대, 그리고 오늘날의 세대 모두가 공유하는 작은 기록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종이 위에 펜으로 쓰는 행위 자체가 그리워진다.
아니면, 머릿속에 억눌려 있던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며
시원하다는 감각을 선사하기 때문일까?
타이핑으로는 이런 감각을 얻기 어렵다.
물리적 키보드든, 화면 키보드든 마찬가지다.
전자펜을 사용하는 사람도 늘었다.
스마트 패드에 종이 질감을 흉내 내는 필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그들도 종이(물리적이든 디지털이든) 위에 펜(전자펜이든 일반 펜이든)으로 쓰면서
비슷한 해방감을 느끼고, 그리움을 해소할까?
“사각사각.”
이 소리는 잘 듣기 힘들다.
심지어 주위가 완벽히 고요할 때에도 그렇다.
종이와 펜의 질감이 서로 다르고, 때로는 소음에 묻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나 등장하는 의성어 같지만,
손끝으로는 이 소리를 느낄 수 있다.
종이 위에 생각을 펼치며 우리는 상상한다.
분명히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고.
막힘없는 순간이다.
쏟아내고, 해소되고, 정리되는 순간.
나는 이런 아날로그 순간을 애써 멀리했다.
이미 손 안에는 검색과 알림이 되는 기기가 자리 잡았다.
별다른 앱을 설치하지 않아도 기본 앱으로 플래너와 다이어리를 구현할 수 있다.
마인드맵 앱으로 생각을 시각화하고, 결과물을 이미지로 저장해 공유할 수도 있다.
그리움이 밀려올 때는 종이에 쓰고, 스마트 기기의 카메라로 찍어 PDF 문서로 보관하면 된다.
요즘은 텍스트 추출 기술도 날로 발전하고 있다.
스마트 기기 하나로 페이퍼리스 세계를 꿈꿀 수 있다.
가방이 가벼워지고, 검색과 알림 기능까지 갖춘 채로.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다.
나는 몇십 년을 종이 위에 살았고, 몇십 년을 터치스크린과 함께 살았지만,
종이 위에 산 시간이 더 길다.
중첩된 기간을 생각하면, 평생의 대부분을 종이와 함께 살아왔다.
그러니 종이 위에 펜으로 쓰는 순간,
막힌 세면대가 뚫리며 물이 시원하게 흘러가듯
생각이 비로소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걸로 충분하다.
결코 스스로 뒤처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나는 개인주의자다.
취향을 중심으로 사는 개인주의자.
취향 안에서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 안에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쉬게 하는 모든 것이 있다.
내 취향은 유연하다.
이 유연함이 내게 행복을 준다고 믿기에, 취향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종이 위에 쓰는 사치.
잉크와 종이를 소모하는 사치.
잉크와 종이를 만드는 자재를 사용하는 사치.
그 막힘없는 순간을 위해 누리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치다.
이제 여러분께 이 아날로그 사치를 권해본다.
막힘없는 순간을 위한, 작은 사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