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길 바라며
얼마 전,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본 장면이 있어.
작은 식당 앞, 통화를 하던 할머니 한 분.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자꾸 고개를 끄덕이시며,
애써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씀하셨어.
“그래, 할머니 또 올게… 아이구, 울지 마.”
아이가 울어 어쩔 줄 모르고, 달래지지 않아 안타까움이 느껴졌어.
할머니는 손에 든 휴대폰을 꼭 쥐고,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지.
그 말끝에서 느껴지는 마음—
그건, 이별이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를 향한 애틋함이었어.
아마도 전화기 너머의 아이는 두세 살쯤 되었을 거야.
말은 어설퍼도 감정은 또렷한, 그 나이쯤.
할머니가 떠나는 게 슬퍼서 그렇게 운 거겠지.
보고 싶어서, 돌아가서,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그 아이의 부모도 분명 사랑으로 돌보며 웃어주고 안아줄 거야.
하지만 그날, 그 아이가 그렇게 울었던 건
할머니에게서 **‘도움’이 아니라 ‘따스함’**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몰라.
존재 자체가 주는 온기 말이야.
그래서 그 품이 그리워서, 눈물이 난 거고.
그리고 며칠 뒤,
정반대의 장면도 봤어.
어느 집 주차장에서,
중년 남자 한 명이 젊은 여자에게 정중하게, 그러나 딱딱하게 말하더라.
“뒷자리가 비었다면 그 자리에 세우시는 게 좋습니다.
앞에 주차하시면 다른 차는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이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논리도 맞고, 상황도 이해돼.
그런데 그 여자의 표정은… 오래 남더라.
작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입술은 굳어 있었고
대답은 나오지 않았어.
사실, 그 여자는 새벽 5시 50분에 출근을 해야 한대.
만약 그 남자가 앞에 차를 댔더라면?
그 시간에 ‘차 좀 빼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과연 흔쾌히 일어나 줄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나는 아니라고 봐.
“이런 실례가 어딨어요, 새벽에…”
“그럴 거면 미리 얘기라도 해주시지.”
아마 그랬겠지.
정말 배려하고 싶었다면,
“혹시 내일 아침 일찍 나가세요?”
이런 한 마디가 먼저였을 거야.
배려는, 말보다 질문에서 시작되는 거잖아.
사람을 위한 말이라면,
그 말로 인해 사람이 기뻐야 정답이야.
‘도움을 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려는 말—
그건 그냥 말하는 사람의 자기만족이지.
‘쓴소리’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무시하지 않았는지,
내가 뱉은 말의 무게를 다시 돌아보게 돼.
좋은 약은 꼭 쓰지 않아.
몸에도 좋고, 입에도 부드러운 약.
사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꼭 대단한 걸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따스함은 사실, 아주 작고 익숙한 데서 시작될 수 있어.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상황을 먼저 물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이 사람, 참 포근하네.”
그런 마음이 스며들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