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Normal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게 될 까?
필자는 ‘매일 행복한 내가 되고 싶다(https://brunch.co.kr/brunchbook/happyday)’와 ‘매일 행복한 나 – 에세이 편(https://brunch.co.kr/brunchbook/happyessay)’을 쓸 만큼 최근 행복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가져온, 강제적 자가 격리,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로 타인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최근에 그 거리가 점점 줄어들어 새로운 일상(New Normal 혹은 Next Normal)이 다가온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타인과의 거리 두기는 한편으로 대인관계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토요일 저녁 혼자 있으면서 우울해지지 않는 법(하이케 팔러 글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 ’100 인생 그림책‘에서 발췌)’을 배우는 기회를 만들었다.
대인관계 스트레스를 덜 느끼게 됐을 때 나는 행복했나? 토요일 저녁 혼자 있어 우울해질 때 나는 불행을 느꼈나? 지금 상기해 보면 그렇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나는 언제 행복을 느꼈을까?
행복은 절대적이자 상대적인 감각일 것이다.
오롯이 나를 주목할 때 행복은 절대적 감각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체험과 경험에 미루어 ‘나는 지금 행복한가?’의 답을 낸다면 이는 절대적 감각이라 하겠다. 타인의 삶을 보고 혹은 타인과 관련되어 ‘나는 지금 행복한가?’의 답을 낸다면 이는 상대적 감각이라 하겠다.
‘대중 속의 고독’, ‘상대적 빈곤감’ 같은 감각은 행복의 상대적 감각이다. 나 아닌 타인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럼 오롯이 나만을 주목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아침에 일어났다. 몸이 상쾌하고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다. 창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싱그러워 보인다. 나는 행복의 절대적 감각을 느끼고 있다. 저녁에 식사를 준비하고 내가 한 음식을 한 입 물었을 때 혀를 통해 입 안에 퍼지는 맛이 좋으면 행복의 절대적 감각을 느낀다고 하겠다. 주말, 늦은 아침을 먹고 근처 공원에 나간다. 입과 코는 하얀 마스크로 막혀 있지만 살에 닿는 햇살이 좋고, 걷는 동안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이 좋다. 행복의 절대적 감각이다.
아침에 일어났다. ‘왜 이렇게 늦잠을 자느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미 다른 가족들은 세안도 하고 말끔한 실내복을 입고 브런치를 즐기고 있다. 나는 어제와 그제, 그 이전의 누적된 피로로 온 몸이 찌부둥 하고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상태에, 일어나자마자 늦잠 잔다는 말을 들었다. 행복의 상대적 감각을 느끼고 있다. 같이 입사하고 목표 달성도 유사한 동료가 먼저 과장을 달았다. 억울하고 우울하고 사기가 툭툭 떨어진다. 행복의 상대적 감각을 느끼고 있다.
가장 나쁜 경우와 가장 좋은 경우를 모두 겪어야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발달하는 것 같다.
가장 나쁜 상황에서 벗어났다. 삶이 여유로와 졌다. 가장 좋은 상황에서 내려오고 있다. 긴장과 집중이 상승한다. 최악과 최선을 직접 체험한 나는 어느 순간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행복이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것이 행복이지 않냐’고 물을 때의 내 상황은 타인의 시선으로 보기에 딱히 좋다고 할 수도 없지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일 때가 많다. 이런 어중띈 상황이 행복일까?
머릿속으로 마음으로 행복이란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스하고 포근한 감각이었다. 막힘이 없고 뜻한 바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 감각이었다. 가장 좋다고 느낄 때 이러지 않았다. 가장 나쁘다고 느낄 때 이 모든 정의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행복’이란 네모일까 세모일까, 아니면 원일까?
행복이란 과연 이렇게 신기루 같은 것일까? 타인에 의해 울고 웃고, 자신으로 인해 울고 웃는 나. 웃을 때 ‘다행이다’라고 생각하지 ‘행복해’라고 느끼지 않는 나. 혹시 행복이란 다행인 것일까? 아니면 ‘이것, 나쁘지 않아’, ‘저것, 나쁘지 않아.’ 이런 상황일까?
매일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는데 무엇을 목표로 노력해야 할까? 정의한다고 하여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 어쩌면 행복이란 ‘잃고 싶지 않은 것을 잃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을 갖는 상태’는 아닐까? 이런 소유적 심리가 행복일까? 생각을 할수록 모르겠다. 자꾸 ‘다행’이 ‘행복’ 같으니 말이다.
이러다 어느 정도 높이에 선을 긋게 되는 것일까? ‘행복은 여기부터’라고. 그런데 이건 싫다.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행복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