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2° 기운다
2025년 8월, 43개월
"어서 오세요~"
숏컷스타일의 헤어가 경쾌한 선생님,
환하게 웃으시며 자리를 권하신다.
나의 증상에 대해 물으시며
시선은 화면에 고정하신 채
열손가락을 바쁘게 타이핑하셨다.
환자는
의사가 성심을 다해 진료해 주는 것만으로
황송해진다.
"힘들게 오셨으니까 수액 맞고 가시죠, 더 힘드시지 않게 제가 잘 놔드릴게요!"
단단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또 눈물이 날 뻔했다.
아플 땐 사람마음이 참 드라마틱해지는구나.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리며
등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예를 차리듯
진료실 문을 닫았다.
주사실에 가셔서 누워계시라는
데스크 간호사선생님의 말에 다시 발을 옮긴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고
병원 에어컨바람에 온몸이 아리듯 아프다.
간신히 침대에 앉아 신발을 벗고
뻐근한 두 다리를 올려놓는
모든 사소한 행동이 굼뜨다.
옆 공간에서 주사기의 비닐을 뜨는 소리,
철제바구니에 약병이 놓이는 달그락 소리 등이 들린다.
긴장되는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쏟아질 듯 바닥을 응시하고 있다.
커튼이 촤르륵 걷히며 간호사님이 들어오신다.
"누워계시라니까 왜 앉아계세요?"
"네, 아니.. 이제 누우려고요.."
"에이그.. 하긴 아플 땐 눕는 것도 힘들어 힘들어.. 이제 편하게 누우세요."
사람이 병원만 오면 작아지고 어리숙해지는 거 같다.
멀쩡하게 제 역할을 해내며 잘 살아가는 사람도
병들고 아픈 상태로 병원에 오면 괜히 눈치 보게 되고.
나는 이런 순간에 특히나 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버린다,
의료진이 나를 귀찮아하거나 까탈스럽다 하지 않고
그럴 만하다, 잘하고 계시다 해줄 때.
"선생님, 제가 혈관이 잘 안 잡힌다고들 하시던데..."
"으응, 괜찮아요. 그런 사람 있어. 제가 잘 볼게요~"
"감사합니다. 괜히... 죄송해요."
"으으응~ 죄송할 일 아니에요. 그리고 원래 아플 땐 혈관이 더 잘 안 보이고 그래요."
"어떡해요, 고생하시겠네."
"아이고 고생은 제가 아니라 환자분이 고생이시죠! 제가 한 번에 잘해볼게요!"
하지만 왼쪽 팔꿈치 안쪽에서 혈관 찾기 실패,
침대에 거꾸로 누워 오른팔을 고무줄로 꽉 묶고
주먹도 쥐었다 폈다 했으나 실패.
"제가 원래 혈관 잘 잡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한 번에 성공해야 고생 안 하시는데..."
알코올솜으로 오른 손등을 슥슥 문지르며 다시 혈관을 찾으신다,
나는 언제 뾰족한 고통이 찌를지 몰라
잔뜩 긴장한 채 왼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애를 낳아도 주사는 무섭네요."
분위기를 조금 풀어보고자 농담 섞인 엄살을 부리자
"어우 그럼요, 그거랑은 달라. 주사는 누구나 무서워해요."
말하는 족족 다 괜찮고 다 당연하다고 다 받아주시는 간호사선생님,
이러시면 저 정말 눈물 나요...
"약하긴 한데 한 번 놔볼게요, 손등이라 조금 아파요. 미안해요, 어쩔 수 없어."
"괜..찮아요, 읍!"
부리는 엄살에 비해 나는
은근히 참을성은 또 좋은 편이다.
바늘을 찔러 넣고 혈관 자리를 잡으시느라
한 동안 살 밑을 휘적이는 게 또 아팠지만 참을만했다.
하지만 실패.
"미안해요, 혈관이 도망 다니네. 아휴 어떡해"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고 다짐하시던 것이
슬픈 복선이 되어버렸다.
이제 엄지손톱으로부터 그대로 타고 내려온 손목 지점,
그곳에 맞는 수밖에 없다.
(아, 거기는 진짜 아픈데...)
"그래도 수액을 맞아야지, 주사 아픈 건 잠깐이니까. 한 번만 다시 참아요."
이제는 선생님도 미안해하시는 게 너무 전해져서
나는 일부러 더욱 의연한 척했다.
"저 어릴 때는 막 발등에도 맞고 이마에도 맞고 그랬었어요. 괜찮아요."
하지만
이번엔 와... 진짜 아프다.
두꺼운 바늘이 묵직하게 들어오는데
이제 됐으려나..? 싶은 시점이 지났는데도
계속 아프다.
찔러넣고도 계속 자리를 잡느라 한참을 참아야 했다.
맞아본 주사 중 가히 제일 아팠을 거다.
"... 됐다!"
드디어 성공.
이제 이불 덮고 누워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되겠다.
긴장이 풀린다.
"춥지 않으셔? 전기담요 틀어드릴까요? 좀 주무세요."
"선생님, 저 코 골면 어떡하죠?"
"여기 오시면 다 코 골아요. 들리지도 않아. 괜찮아요, 그럼 쉬세요."
들리지도 않는데 다들 코 고신다는 건 무슨 배려의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그냥 자자.
노란 약이 한 방울 똑,
또 한 방울 똑 떨어지는 걸 보고 있노라니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렸다.
"좀 괜찮으세요?"
촤르륵 커튼을 여는 소리에
얕은 잠이 깼다,
숏컷헤어의 의사 선생님께서 커튼 뒤로 얼굴만 내밀고 웃고 계신다.
"우리~ 이거 기왕 맞는 김에 글루타치온도 좀 달아드릴까?"
"네? 그게 뭐예요?"
진짜 그게 뭐지? 어디서 들어본 단어인데, 글루타치온..?
"얼굴 환해지게! 아파도 또 예뻐져야 하니까, 응? 남자들한텐 권하지도 않아요~"
"아아... 네, 뭐 뭐든 놔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래요, 기왕 이거 꽂은 김에~ 그럼 달아줄게요?"
웃으며 다시 커튼을 촥 닫으신다.
글루타치온,
그래 올리브영 이런 데서 미백 화장품 광고 본 거 같다...
다시 잠이 든다.
전기담요는 틀지 않았지만 조금 더워져서 눈을 떴다.
손 발이 찬 상태로 잠이 들었었는데 뜨끈해져서 깼다.
눈을 굴려 이쪽저쪽을 살펴본다,
살짝만 몸을 뒤척여봐도 수월해진 이 느낌.
다시 행동이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일어나셨어요? 약 다 잘 들어갔어요, 이제 빼드릴게요."
아까와 다른 간호사선생님이다.
점심시간이 겹쳐서 다들 식사하러 가신 모양이다.
"한 3분 더 누워계시다가 천천히 일어나세요."
바늘을 뺀 자리에서 피가 조금 난다.
알코올솜으로 꾹 누르고 있다가 일어나니 뒷머리가 굉장하게 눌려있다.
머리 무새를 매만지며 덮었던 이불을 다시 원래대로 갠다,
수액 놔주시느라 고생하신 선생님께 최소한의 보답으로.
약국에 들러 처방받은 약을 기다리며
태은이가 좋아하는 텐텐이랑 뽀로로비타민,
언제 또 코가 막힐지 모르니 나잘 스프레이도 챙기고
항상 집에 몇 개 쟁여놓고 싶었던 레스큐라이트액도 보이길래 같이 계산했다.
몸이 살만해지니 마음도 너그러워진 듯,
가격표도 확인 안 하고 신나게 약 쇼핑을 해댔다.
병원 근처 공원에서 놀고 있던 남편과 아이를 기다리며
약국 옆 올리브영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시원하다.
즐겨 쓰는 폼클렌져도 하나 새로 사고
단 것이 무척 당겨서 젤리도 두어 개 집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도 사려고 고르는데
"엄마!" 하는 소리에 보니
새빨개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며 태은이가 들어온다.
"엄마, 고생했어!"
하며 보라색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민다.
"고마워, 태은아! 아빠랑 꽃집 갔었어?"
"어! 아빠가 엄마 주자고~ 예쁜 보라색 꽃을 같이 샀어!"
혼자 태은이 데리고 이 더운 날 밖에서 노느라
나보다 고생 많았을 텐데
꽃까지 챙겨주는
꽃 같은 마음에
나도 꽃처럼 웃게 된다.
대단한 금의환향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어주는 큰 김 씨와 작은 김 씨.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남자를 다시 만나니
마음이 괜히 든든하고 의기양양해진다.
"좀 괜찮아?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네."
"응 여보, 근데 진짜 웃긴 일 있었잖아."
"응? 뭔데 뭔데?"
"아니, 여보는 지난주에 여기서 수액 맞을 때 선생님이 글루타치온 얘기 안 하셨지?"
"글루타치온? 그게 뭐야?"
"진짜 웃겨, 나 사경을 헤매던 중에 영업당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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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찾았는지 초콜릿과자를 냉큼 집어 들고
계산 바구니에 넣는 아이에게
어어 그래 사줄게~ 하며
남편과 나는 낄낄 웃었다.
"점심도 먹고 태은이 장난감도 사러 백화점 가자!"
"뭐 먹지? 고등어? 아 돌솥비빔밥도 먹고 싶은데!"
"토미카부터 사러가자! 응? 제발~"
태은이의 양팔로 우리 세사람 손을 이어잡고
귀여운 동상이몽을 품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
체온이 2℃ 내려오자
기울었던 일상의 2°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