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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n 11. 2018

어느 유럽 도시의 금요일 오후 풍경



햇빛이 그리웠던 아가씨들이 둘둘이 모여 비키니를 입고 초록 잔디밭에 누워 선탠을 하고,  

그 옆에는 슈나우저 한 마리와 작은 치와와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커플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아이스 박스에서 맥주를 꺼낸다.  


 

그들 앞에 펼쳐진 호숫가에 햇빛이 잘 드는 벤치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검은 티를 입은 갈색 빛깔 머리칼이 멋진 남자가 클래식 기타를 품에 안고 조용한 음률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커플이 멈춰 서서 저 멀리 패들링을 하거나 보트를 타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따라가다 보니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기 넷이 보인다. 비슷한 나이 또래 아기를 가진 엄마들의 모임인 걸까. 두 명 두 명씩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다. 모두 비슷한 또래의 아기들인데, 어릴 땐 특히나 더 귀여운 독일 아기들이 네 명이나 모여있으니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메랄드빛 모자와 티셔츠로 깔맞춤을 한 남자 아기 하나는 돗자리도 벗어나서 그냥 잔디밭 위를 엉금엉금 맨손 맨발로 기어 다닌다. 그 옆에는 아기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별다를 것 없이 돗자리를 옆에 두고도 잔디밭 위에 내 집처럼 앉아있다. 아기는 엉금엉금 기어서 옆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검은 개에게 다가갔다가 엄마에게 갔다가 다시 돗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내 조카였다면 지지라고 얼른 안아 들고 돗자리 위로 데리고 왔을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아하는 그 모습이, 사실은 가장 자연스러워야 할 모습인데 나에겐 어색해 보였다.


  

아이가 건드려도 그러든지 말든지 쿨쿨 낮잠을 자던 개는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일어나자 어느새  따라 일어나 뒤를 쫓으며 놀아달라고 짖어댄다. 여자와 개가 멀리 사라지는 듯해서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느라 보지 못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개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 어느새 물에 흠뻑 젖어서 입에 나무 가지 하나를 물고 있었다. 물어오라고 던져준 나뭇가지가 어쩌다 물속에 빠졌었나 보다.  



 

갑자기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걸어간다. 특별한 모임이 아니면 저렇게 모여 다니지 않을 텐데 아마 함께 산책을 하는 모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어느새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휴식을 마쳤는지 자리를 비우고 또 다른 남자 네 명이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걷다 말고 조금 쉬어가려는 모양이다. 세명은 벤치에 걸터앉고 한 사람은 스케이트 보드에 올라타 균형을 잡아본다. 흰 면바지와 그라데이션이 예쁜 하늘색 티셔츠가 스케이트 보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갓난아기처럼 작아 보이는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달리기를 하며 지나갔다. 급한 뜀박질이 아니라 차분히 리드미컬하게 달려가는 운동의 달리기. 유모차와 달리기라니.  

저런 남자들을 종종 보긴 했지만 (많지는 않다)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아와 취미를 함께 해결하는 것도 신기하고, 육아를 하면서 운동을 병행하는 자체도 신기하고. 


 


 

위 글을 적고 있는 동안엔 트레이닝 복을 입은 네 명의 남자가 러닝을 하며 지나갔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는 하지만 몸에 맞지 않기도 하고 오래 못 뛰는 타입이라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동경하며 쳐다보게 되는데, 네 남자 중 한 명의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단어가 읽혔기 때문이다. 새하얀 흰 셔츠의 뒷면에는 지멘스(Siemens)가 초록색인지 푸른색인지 그런 색깔로 새겨져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조금 확신이 서지 않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삼성 로고가 새겨진 흰 티셔츠를 입고 한강공원을 달리는 건가 생각하니 뭔가 조금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헬스장에서 본 한 중년의 아저씨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는 바이어스도르프(Beiersdorf)가 적혀있었다. 바이어스도르프는 니베아의 회사 이름이다. 최근 니베아를 판매하기 시작해서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까 생각하다가 왠지 소심해져서 (가 아니라 많이 소심함)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어떤 아주머니가 몸에 풀세트를 두르고 - 백팩, 자전거 헬멧, 허리에 질끈 묶은 잠바 - 한 손으로는 콘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유히 지나갔다. 우리나라는 자전거가 취미나 스포츠 정도라면 이 곳은 자동차만큼이나 하나의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많이 타기 때문에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들이 많다. 내리막길을 양손을 놓고 내려오는 남자를 보며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은 또 처음 봤다. 독일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자전거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나라도 신호 위반을 하는 자동차가 있고,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자전거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잘 지키는 듯하다. 나는 처음엔 몰라서 못 지켰지만.  

 예를 들어 자전거도 자동차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야 한다는 것. 그 외엔 자전거가 달릴 때 꼭 라이트가 들어와야 한다. (자동차 라이트만큼 자전거 라이트도 중요하게 여긴다. 경찰이 종종 잡기도 한다고.) 헬멧은 쓰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왜 안 지키는 걸까 궁금했는데 헬멧이 필수 사항은 아니라고 한다.  

날씨가 좋아지니 자전거가 사고 싶어 진다. 흠. 


 


 

글을 쓰는 동안 선탠을 하던 아가씨 한 명은 어느새 집에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고, 호수 위에는 패들링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어떤 사람들은 페달 보트를 타고, 어떤 사람들은 유람선을 타고, 어떤 사람들은 요트를 탄다.  

바람은 적당히 살랑살랑 불어오고, 햇빛이 조용히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집에서 30분 거리에서 이런 풍경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벅차오르며 행복해졌다.

매일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하는,

어느 유럽 도시의 금요일 오후 풍경, 끝.








글쓴이는: 

필명 노이(Noey). 

30대인 게 행복한 평범한 사람.

꽃길인 줄 알고 들어간 회사에서 흙길만 밟다가 나옴.

잠시 디지털 노마드를 꿈꿨으나 천성이 집순이인 것을 나이 서른에 깨닫고 보류 중. 

더 늦기 전에 독일 워홀 비자를 써보려고 작년에 독일에 왔다가 얼떨결에 아직 독일 거주 중. 

호기심이 폭발할 때, 감성이 충만할 때 글을 쓰며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도전해 보는 중.



- 함부르크 구매 대행 블로그: https://lifeisllll.blog.me/

- 개인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oey_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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