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의 존재 이유와 할 일들
얼마 전 지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한 분이 물었습니다.
HR의 성과는 뭔가요? 뭘 해야 잘했다고 하나요?
순간 머리가 멍했습니다. 머릿속에 확실하게 떠오르는 말도 없고, HR의 역할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진지하게 설명할 분위기도 아니어서 '그냥 뭐 새로 인사제도를 만들거나 기존에 문제가 있었던 것들을 개선해서, 그게 직원들한테 긍정적인 반응과 좋은 변화를 가져오면 그게 HR의 성과가 아닐까요?'라고 어물쩍 넘어갔더랬습니다. 질문을 던진 분은 소위 회사 '돈을 벌어다 주는' 사업 부서에서 일하는 분이었는데 제 대답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날 집에 오는 길,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늘 하는 일과 역할에 대해 평소에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다른 직원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해 줄 만큼 일의 가치를 설명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쪽팔렸죠.
그래서 그 이후 생각을 해봤습니다. 직원들이 생각하는, 바라는 HR의 성과란 과연 무엇일까?
HR 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이번에 채용을 어디서 누구 했네, 인사제도를 새로 개편을 했네, AI 챗봇을 새로 론칭했네, 조직문화 진단 점수가 올랐네, 전 직원 행사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네, 강사 누구 불러서 했는데 분위기 좋았네" 하는 우리끼리 하는 자화자찬 말고 직원들이 HR에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하고 싶게 하는 회사
고민 끝의 제 결론은 '일하고 싶게 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반대말은 '퇴사하고 싶게 하는 회사'겠죠.
한 2~3년 전부터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는 말이 유행하잖아요. 말 그대로 회사를 다니고는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이미 퇴사한 상태, 무언가에 기여하려는 의지를 상실한 채로 간신히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말하죠. 더 놀라운 것은요, 2024년에 한국 직장인 11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스스로를 조용한 퇴사 상태다라고 답했다는 것이에요. (출처 : [HR Insight] “조용한 퇴사가 왜 문제죠?” < HR INSIGHT < Magazine < 기사본문 - 포춘코리아 디지털 뉴스)
회사를 출근하면서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이미 퇴근을, 혹은 퇴사를 생각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입니다. 회사 네임벨류가 떨어져서, 앞으로 비전이 안 보여서, 내가 일하는 만큼 보상과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열심히 일해봐야 나만 손해 보고 아무런 소용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옆에 있는 리더나 동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실 이들 중 하나만 있어도 회사 다닐 맛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보통은 이런 경우는 2개 3개씩 여럿이 합쳐서 찾아오니까요. 그러면 회사에 남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질 수밖에요.
인사 담당자로서, 직원들이 퇴사각을 세게 잡게 만드는 이런 것들을 최대한 없애고 줄여주는 것이 가장 필요한 역할이고 제일 큰 성과가 아닐까 합니다. 앞서 열거한 퇴사를 부르는 사유의 대부분이 HR의 하는 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일 겁니다. 예를 들어, 일한 만큼 제대로 만족스러운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가짜가 아닌 진짜로 기여한 사람들이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도록, 하고 싶은 일을 최대한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주변에 이상한 사람보다는 멋진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 있도록, 회사가 좋은 일하는 문화를 갖출 수 있도록 한다면 퇴사보다는 오래오래더 다니고 싶은 회사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직원들이 다른 근심 없이 즐겁게 일만 하여도 좋은 회사를 만드는 것. 그것이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HR 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일 겁니다.
그런데 생각을 마무리하려다 보니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평소 직원들이 HR에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했었나? 아니 애당초 HR이 하는 말과 일을 신뢰하기는 하나? HR 때문에 오히려 더 퇴사하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
야 조심해, 얘 HR이잖아
친한 회사 동료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회사에 관한 불만이나 고민이 나오면 누군가는 꼭 이렇게 말하거든요. "야 조심해, 얘 HR이잖아." 농담처럼 웃어넘기지만 사실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긴 해요. 만약 이런 농담이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레 나오는 분위기의 회사라면, HR이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 나갈 길은 멀고도 험난하겠죠.
네, 그래서 HR의 성과가 무엇이고, 일하고 싶은 회사가 어떻고 따져 묻기에 앞서, 직원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얻는 것이 더 급선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측의 '사'가 경영진이나 사용자만을 위하는 게 아니라 '회사(社)'의 모든 구성원을 대변하는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때, 직원들이 더 이상 "HR이니까 조심해"가 아니라 "HR이니까 이런 걸 말할 수 있는 거지"라며 피하지 않고 서슴없이 걱정과 고민을 꺼내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HR의 성과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제대로 답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HR #인사 #조직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