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Discord 13화

#13. 보고서는 사실 일이 아니다

그저 멋들어진 글쓰기가 아닌 진짜 일을 한다는 것은

by 인사부조화



선제적으로 우수인재를 확보/리더십 pipe-line을 구축하여 미래 성장을 도모하고, 직원들의
pain points를 상시 개선하여 지속적으로 동기부여
하고, 부족한 역량 set를 모니터링해서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보상 시스템을 통해 지속적으로 리텐션을 해주고, 효과적인 역할 수행을 위해 체계적인 조직 구조와 R&R을 기획하고, 기업의 핵심 가치를 내재화시켜 우수한 기업문화를
조성하고, 신규입사자들을 안정적으로 온보딩하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진짜 좋은 말이지 않나요? 문제는 이 좋은 말이 매년, 매월, 매번 보고서 안에서만 반복된다는 점이죠. 알록달록한 도형과 말끔한 슬라이드가 바뀔 뿐, 내용은 재작년·작년·올해를 이어 매해 거의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내년에도 또 똑같은 slide를 보게 되리라는 걸 떠올리면 허탈함에 웃음이 납니다.


처음엔 이러한 반복을 선의로 해석했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이니 계속 강조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습니다. 이건 그저 희망사항의 나열이었습니다. “내일부터 다이어트 시작”, “연말까지 자격증 취득” "매일 영단어 30개 외우기" 같은 말. 듣기 좋고 예쁘고 안전하고 당연한 말들. 그런데 이런 말뿐인 목표만으로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희망사항을 얘기하는 일은 쉬운 전략입니다. 누구라도 좋다고 응원할 것이고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대로만 된다면 좋잖아요? 오히려 이처럼 목표나 명분이 단순 명료하다 보니, 조직은 그 당위성의 증명에 정말 많은 에너지를쏟습니다. 소위 '기획'이란 걸 한다 그러죠. 왜 그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지, 그간의 문제가 무엇이었고, 어떤 관련 데이터가 있는지 여러 디테일한 이유와 근거를 새롭게 조사하고, 그걸 이렇게 저렇게 멋지게 조합해 체계적으로 실행해서 달성하겠다는 식으로 화려하고 세세하게 잘 정리된 '보고서'를

열심히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 '뭔가를 해보겠다는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보고되면 끝이에요. 온갖 수고를 여기에 다 바칩니다. 수십 장의 예쁘게 작성된 PPT 만으로도 사실상 일이 다 된 것 같습니다. 그 PPT를 쳐다보고 있기만 해도 뿌듯하고 당연히 이대로만 되다면 목표달성은 쉽게 가능하니까요.


그런데요ㅡ 다이어트를 예를 들면, 트레이너와 같이 열심히 계획을 짜요. 3달에 -15kg라는 좋은 목표를 두고 매일 운동을 뭘 하고 식단 조절을 어떻게 하고 3달 마스터플랜을 열심히 세밀하게 만들어서 어떤 전문가가 봐도 정말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쳐봐요. 계획만 봐도 뿌듯하죠. 그런데 그 계획만으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살이 빠지나요? 아니죠. 아무리 계획이 완벽하고 철저한들 계획은 계획일 뿐 그에 맞는 실행이없으면 그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 거죠.





소위 "광팔이"들이 이렇게 탄생합니다. 그럴듯한 문장, 멋진 slide 디자인, 현학적인 스토리라인으로 뻔하고 당연한 목표를 갖고 멋지게 광을 만들어 팝니다. 공들인 판매가 끝나고 나면 복잡하고 고되고 어려운 '실천'과 '운영'의 번거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몫으로 미루고, PPT 예쁘게 잘 만든다는 이들은 또다시 새로운 광 팔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바뀌는 건 하나도 없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작년 재작년에 봤던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가 올해 또다시 등장하는 이유라 생각해요.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컨설팅'을 아주 못마땅해했다고 하죠. 결국 컨설팅 업이라는 것이 현란한 보고서와 말로써 계획을 열심히 세일즈 하는 것인데, 실행은 사실 이들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으니까요. "이렇게 하면 좋다"는 식의 말만 있을 뿐, 실질적인 일의 실행과 결과는 전혀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실행의 세세한 과정과 실행 결과에 대한 내용을 일의 첫 단계에서 만든 기획보고서보다 더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본 적이 있냐, 본 적이 있냐 물으면 솔직히 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왔는지, 보고서란 원래 무엇을 위해 쓰여야 했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HR #기업문화 #보고서 #일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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