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이 목적을 집어삼키지 않기 위해
한 배가 신대륙 발견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출항을 합니다. 탑승한 선원들 모두 기대에 가득 차 있었죠. 선원들은 신대륙 발견이라는 하나 된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습니다.
항구를 떠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배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배에 실은 식량이 예상과 달리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죠. 이대로 가면 목표했던 신대륙에 도착하기도 전에 식량이 먼저 고갈될 것 같았습니다. 선장은 즉시 믿을만한 사람들을 시켜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원인은 쉽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밤중에 몰래 훔쳐먹다 걸린 사람들 몇몇을 잡아내긴 했지만, 그들만으로는 이 상황들이 전부 설명이 되지 않았죠. 그래서 선장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우선 선원들의 식사량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공지를 걸었습니다. 선원들은 배고픔으로 제대로 노를 저을 수 없다고 항의했지만 선장의 뜻을 꺾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되려 상당수의 선원들을 별도로 차출해서 식량 창고 앞을 24시간 내내 감시토록 했습니다. 가뜩이나 배고파 힘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 더 적은 인원들끼리 노를 저어야 하니 배의 속도는 점차 줄고 어느 순간부터는 제자리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속도로 신대륙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식량이 떨어지면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매일매일, 어느덧 선원들의 머릿속에 신대륙 발견이라는 원래의 꿈과 목표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식량을 아끼고 지켜야 한다'는 선장의 외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선원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식량을 아끼러 배에 탄 것인지 신대륙을 찾기 위해 배에 탄 것인지 이제 헷갈리기 했습니다. 창고앞을 지키고 식량을 아끼는 게 일상의 주 업무가 되어버렸거든요.
일을 하다 보면 간혹 '이 일을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죠. 그때 일의 목표와 방향성을 다잡지 않고 일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나중에 가서 대부분 쓸모없는 일이 되어 버리거나,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보고서의 저 끝 뒷자락에 appendix라는 이름으로 모아져 간신히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한 건데~"라는 작성자 본인 스스로의 위안과 함께요.
더 안타까운 순간은 일의 과정과 수단이 일의 목적을 삼켜 버릴 때입니다. 부푼 꿈을 안고 신대륙 찾아 떠난 항해 중 어느새 식량 절약이 주된 업무가 되어버린 선원들처럼 말이죠. 가령, 보고서를 쓰는 본래 목적은 필요한 정보 전달과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돕기 위함인데, 디자인 양식과 미적 완성도에 집착하거나, 모든 정보를 시각화, 문서화하여 점점 늘어나는 page 수에 누군가 뿌듯해하고 만족해하기 시작하면 보고의 원래 취지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보고서 잘 쓰기' 그 자체가 일의 주된 목적이 되어 버리죠.
성과 평가 제도 같은 것들도요, 더 높은 성과를 촉진하고 동기부여하기 위해서 KPI 같은 제도를 만들어 놨더니, 실상은 진짜 성과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KPI 점수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달성하기 편한 목표와 scale을 만들고 점수 받기에만혈안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나 최근에 몇몇 회사들에서는 AI가 핫하니 직원들이 AI 도구를 업무 하는데 얼마나 자주 쓰는지, 또 많이 쓰는지 AI 활용도를 측정하고 평가한다고도 하거든요. AI를 업무에 써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AI를 진짜 써야 하는 이유라든지 어디에 써야 효과적인지 같은 것들은 정작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하고요.
조직 문화의 변화/혁신이 팀 내에 워크숍이나 미팅 횟수, 서베이 만족도 점수 같은 것들로만 재단되고, 조직의 미래와 경쟁력이 비용 절감 성과나 인력 효율화 같은 숫자들로만 논의될 때, 원래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이 식량 창고 앞이었는지, 신대륙이었는지를 다시금 떠올려볼 시점입니다. 식량 창고를 열심히 지키고 식량을 아껴먹고 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죠. 그런데 그것들이 목적지로 향하는 수단이 아니라 최종 목적이 되면요, 정작 열심히 노젓던 사람의 노는 뺏고, 밥 굶겨 힘을 빼버리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사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했는지보다는 그 수단들이 결국 우리를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일들인지, 아니면 오히려 목적지에 가지 못하게 하고 창고 앞에서만 빙빙 맴돌게 만들고 있진 않은지를 묻고 따져야 합니다. 달을 보라했더니 가리킨 손가락만 보면서 예쁘다고 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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