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과 갑각류의 공통점
첫눈에 반한 너, 버킨
나만의 취미를 찾아가던 나는 물감 대신 노트북에 전자펜으로 그릴 수 있는 드로잉에 빠졌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본다고 펜을 잡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걸 노트북 화면 위에 잡고 쭈욱 늘어뜨리면 선이 그려지고 점을 찍으면 점이 나타나는 것도 신기했다.
그렇게 색을 바꿔가며, 질감을 바꿔가면서 몇 번의 스케치를 해보던 어느 날이었다. 나의 얼굴책 페이지 중에는 베를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쓰지 않는 것, 혹은 팔고자 하는 물품들을 올려서 사고파는 온라인 중고마켓이 있었다. 그 얼굴책 페이지를 무심코 넘기다가 어떤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멈췄다.
'누군지 몰라도 스케치를 참 예쁘게 했네.'
그런데 가만히 쳐다보니 스케치가 아닌 식물이었다.
'이런 식물이 정말 있나?'
이 사진이 누군가 그려 놓은 스케치인지 진짜 식물인지 알아보려고 검색을 하다가 그렇게 첫눈에 식물이라는 생명체와 사랑에 빠졌다. 내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았던 그 아이의 이름은 Philodendron Birkin, 우리나라에선 '필로덴드론 버킨'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렇게 필로덴드론 버킨이라는 아이를 찾아보며 세상에는 식물이라는 내가 몰랐던 커다란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어느새 나의 취미는 식물을 키우는 것이 돼버린 것 같았다.
나에게는 처음 알게 된 식물의 세계였지만 나만 몰랐던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미 인터넷 상에는 식물과 관련된 비즈니스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여러 온라인 식물원들에선 사람들이 다양한 식물들을 손쉽게 구매하고 집까지 받아볼 수 있도록 직접 배달까지 해주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인터넷 화원에는 무척이나 많았던 필로덴드론 버킨을 하나 주문해 놓고 실물을 마주하기를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이나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인 듯했다.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면서 사람들은 밖에 나가기보다는 손쉽게 집까지 배달해주는 온라인 식물원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나처럼 식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코로나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새롭게 반려 식물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인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한창 예쁜 봄, 4월에 주문했던 식물들은 그렇게 초여름이 시작되는 6월까지 깜깜무소식이었다.
한국이라면 기다리는 사이사이 지연 안내 문자나 메일이라고 연락이 왔을 텐데 온라인 식물원에서는 내가 주문을 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런 업데이트가 없었다. 그런 당연한 것들을 하지도 못할 만큼 주문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인지 아니면 독일은 원래 그런 서비스들을 굳이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처음 식물들을 주문했을 때는 한국에서의 서비스만 생각하고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거라곤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나는 첫눈에 반한 식물을 주문해 놓고도 두세 달을 잠자코 기다리고만 있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자연의 계절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남편은 나에게 취소할 것이냐고 물었지만 그렇다고 식물을 키워보겠다고 했던 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유럽의 봄은 제법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정말 유럽의 봄이 아시아의 봄보다 더 아름다워서인지 아니면 독일의 겨울이 너무나 어두워서 상대적으로 봄이 더 밝아 보이는지는 이제 겨우 한 해를 살아본 나에게는 헷갈리는 부분이었다.
독일의 겨울은 길었다. 그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트리만이 아니라 도시 곳곳이 하나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된 것 같던 11월, 12월까지는 사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아서였는지 화려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되고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끝난 1월부터 3월까지의 독일 날씨는 듣던 대로 회색이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키운다고 해도 그 새로운 생명마저 회색빛에 잡혀 먹힐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서머타임이라는 것이 시작되고 어느새부턴가 밤보다 낮이 길어지는 시기가 오면서, 겨울보다 짧은 봄은 자신의 시간을 아는 것인지 겨울보다 훨씬 빠르게 세상을 회색에서 초록색으로 바꿔 놓았다. 내 눈앞에선 매일 같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기만 해도 무언가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지난겨울, 우리 집 베란다 앞에 있는 나무 위에 작은 둥지를 틀었던 비둘기 커플들은 올봄이 되자 그 텅 비었던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나뭇잎들이 풍성하게 자라 드디어 그들의 사생활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는 것을 보니 괜스레 내 마음도 무언가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쉽사리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주변의 친구들이 토익이나 자격증을 따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누가 이걸 땄고 누가 어디를 다닌다더라, 혹은 누구네 며느리는 사위는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해도 나는 다른 누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쉬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들 나름대로의 길이 있고 삶이 있겠지, 각자에게 맞는 방법대로 살아가면 그만 이지하며 남들이 무얼 한다고 따라가 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하게 창밖의 풍경이, 다른 나무들이 저리 초록의 싱그러운 이파리들로, 형형색색의 꽃을 피워 대는 것에는 내 마음이 이리 흔들리고 있었다. 저렇게 나무들이 자라고, 새싹들이 피어나니 나도 무언가를 심고 싶어 졌다. 아무리 똥 손이라도 봄이라면, 이렇게 모든 것을 피워 나게 하는 봄이라면, 누구든 무언가 하나쯤은 심어도 싹을 틔워줄 것 같은 봄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신안의 작은 섬에서 매일같이 무언가를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우리 할머니나 독일에 사는 할머니들이나 모두 비슷한 것인지 슈퍼마켓이고 철물점이고 식물원이고 독일의 어딜 가든 다양한 씨앗들을 담긴 패키지들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내 첫 번째 식물들을 기다리며 집에서 가장 자주 먹는 채소와 허브들의 씨앗과 모종을 사서 먼저 화분들을 채웠다. 대파와 부추도 통째로 흙에 심었고, 오레가노, 민트, 로즈메리, 세이지, 타임, 라벤더는 허브들끼리 함께 심어주었다. 유기농 마켓에서 산 샐러드 씨앗들은 얇은 종이 두 장 사이에 씨앗들을 일정한 간격대로 고정시켜 팔았는데, 그 종이를 흙 위에 놓고 물만 주면 되는 무척 간단한 방법이라 신기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무얼 자주 먹나 생각하다가 매운맛을 좋아하는 남편 음식에 듬뿍 넣어주려고 고추도 심고, 피클을 담가 먹을 수 있나 싶어 오이도 심고, 그냥 빨갛기만 한 토마토 말고 목포 바로 옆에, 유명한 유교리 찰토마토가 먹고 싶어 왠지 비슷한 색깔인 듯 한 짭짜롬하게 생긴 토마토 씨앗도 심었다.
그렇게 씨앗들을 심고 난 뒤, 첫 한 달은 씨앗들이 고장 난 건 아닌지 매일 물을 줘도 흙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의 봄 날씨는 따뜻해지는 것이 싫은지 태어나려는 새싹들도 다시 쏙 들어가게끔 너무 춥고 변덕스러운 날씨를 오갔다. 그런데 정말이지 어느 순간부터 '톡톡톡' 소리 나듯 새싹들이 뿅 나타났고, 금세 작은 포레스트, 그들 만의 숲을 이루며 쑥쑥 자랐다.
식물과 나, 씨앗과 갑각류의 공통점
그렇게 매일 같이 조금의 시간과 노력을 이며 새싹들을 키우는데 지금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필리핀에 오래 살다가 갑자기 베를린에 온 나는 이 곳의 유치원 아이들보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기분이 딱 이제 말을 띄우는 이 만큼의 새싹 정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새싹을 키우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 당장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코로나고 뭐고 원래의 나대로, 나다운 모습으로 일도 하고 가족도 챙기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새싹을 키우다 보니 지금 내가 이 새로운 곳에서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겨우 다시 새싹이었다. 열심히 인생의 한 챕터를 잘 살아보고 그 나무에서 나온 씨앗을 다시 띄워보려고 했더니 흙이 필리핀에서 독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리 같은 씨앗이라도 새로운 흙에서, 환경에서 자라기 위해선 또 그만큼의 노력과 적응이 필요한 것이었다. 당장 일을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기왕 아주 새로운 직종을 옮기는 김에 내가 키우고 있는 이 새싹처럼 지금 내가 딱 그 정도이다 생각하고 이 새로운 분야에 대해 넓게 이해하고 성장하는 시기로, 위기를 기회로 여기자고 마음을 위로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채소들을 키우다 보니 신기하게도 중고등학교 이후로 특별히 찾아보지 않던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생물학이나 뇌과학 분야들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던 이 작은 새싹들을 보며 겹치는 것들이 생겨났다.
채소를 키우면서 알게 된, 그리고 궁금한 것은 새싹은 한번 나오면 쑥쑥 크는 것은 금방인데 왜 그 새싹이 씨앗에서 나오기까진 그리도 오래 걸리는 걸까였다.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은 물을 주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무언가를 듣고 생각하며 씨앗들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뇌과학자인 장동선 선생님의 갑각류 이야기를 듣다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학부에서 생물학을 공부하다가 갑각류는 어떻게 성장하는 걸까 질문이 생겼다는 선생님.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하셨다.
"갑각류는 껍질이 있어서 겉은 딱딱하지만, 허물을 벗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아주 말랑말랑하다. 그래서 껍질을 탈피한 직후의 갑각류는 아주 약한데 갑각류가 성장하는 때는 오직 가장 약해져 있는 바로 그 순간이다."
- 장동선 선생님, 알아두면 쓸모 있는 알쓸신잡 중 -
신기하게도 씨앗과 새싹도 갑각류처럼 그랬다. 저렇게 딱딱한 씨앗들은 왜 저런 모양으로 태어난 것인지도 궁금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딱딱한 씨앗에서 그 와는 정 반대의 연하디 연한 새싹이 나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단단한 씨앗 속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새싹 하나가 툭하고 떠져 나오는데 그렇게 연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귀엽고 연한 연두색의 새싹인지 원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분무기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물 한줄기로도 이파리들이 넘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작고 연약한 새싹들이 그 단단한 씨앗 때보다 훨씬 쑥쑥 자랐다. 그래서 허물을 벗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아주 약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성장하는 순간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는데 내가 키우는 식물들이 이해되는 듯했고, 또 지금의 나도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몸은 척추동물이지만 마음은 게나 가재처럼 갑각류가 아닐까 싶었다. 저도 마찬가지로 성장하는 순간은 가장 상처 받을 수 있고 약해진 순간인 것 같았다. 우리도 껍질이 있어서 상처 받지 않고 잘할 수 있다는 배짱이 생기면 좋겠지만, 내가 성장하는 순간은 그런 순간들이 아닌 것 같았다. 죽을 것 같고 잡혀 먹을 것 같고, 너무 약해서 스치기만 해도 상처 받을 수 있는 그 순간들에 우리는 크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거의 한 달 하고 두 달이 가까워진 새싹들은 벌써 채소가 되었다. 상추는 다섯 번을 따서 먹었고 샐러드도 매주 먹었고 오이와 토마토는 이제 그 작은 화분이 모자라 큰 화분에 옮겨주었다. 씨앗들이 결국엔 다 익은 과일이 되고 야채로 자랐듯 아마 지금의 나도 언젠가 또 그렇게 자라게 되지 않을까. 다만 토마토와 오이와 상추가 다르듯 우리들이 성장하는 방법도 속도도 모두 다 다르게, 자기에 맞는 자신들의 속도와 방법으로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은 함께 성장하는 건가 보다. 식물들을 키우며 나도 함께 성장하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