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유묘 식물
내가 식물을 키운다면이라는 상상을 어렴풋이 머릿 속에 떠올려보면 어떤 초록색의 무언가가 둥둥 떠다닌다. 그러다 어떤 특정한 식물 하나를 알게 되고 그 이름을 가진 식물을 찾아 식물원이나 화원에 가면 그제서야 그 때 알았던 식물이 이런 모양과 크기를 가지고 있었구나를 알게 된다. 하지만 같은 식물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면 분명 같은 이름을 갖은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다양한 가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보통 그 이유는 그 크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식물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도 얼마나 작고 큰지, 그 크기에 따라 눈에 선명히 띄게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잎파리 하나하나가 이미 큼직큼직해서 정글 같은 느낌을 뿜어내는 어른 식물들을 좋아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잎파리 뿐만 아니라 식물 하나 자체가 손바닥만해서 너무나 앙증맞은 귀여운 어린 유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경우엔 식물은 좋은데 한가지 보다는 여러가지의 식물들을 돌보는 것이 흥미롭고, 그 다양한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집 공간이 좁다보니 여러모로 다 큰 식물들보다는 어린 유묘가 더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과 상황이 비즈니스의 타겟이 되어 실제로 이런 특징들을 고려해 어린 유묘만 알맞게 파는 웹페이지들도 있었다. 물론 막상 화면으로 보면 작은 식물들이라고 해도 얼마나 작은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데, 그래서 결국엔 이 어린이 식물이 얼마나 작은지 혹은 생각보다 큰 아이인지는 주문을 하고 직접 받아봤을 때에나 가능하다.
새싹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큰 청소년 같지만 식물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린이 같은 그야말로 작은 유묘, 베이비 플랜츠. 아직 어린 식물이기 때문에 햇빛이나 물, 바람, 흙 모든 조건에 예민할 수 있어서 나는 작은 종이에 이름표를 만들어서 하나하나 성격을 파악했다. 어떤 아이는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어떤 아이는 티비 서랍장 옆 어두운 곳에 잘 숨겨두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 아이들의 조상들이 살던 원래 환경에 최대한 맞춰 나름대로 메뉴얼을 따라 키워보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우리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손님이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이 어린이 식물들을 본다면 가끔씩 만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하듯 '어머, 아이들이 정말 쑥쑥 크네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집 어린 유묘들도 크게 자란걸 알 수 있으려나 싶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물을 주고 상태를 살피는 식물 집사에게는 베이비 플랜트, 어린 유묘들은 참 더디게도 자라는 것 같다.
‘이게 정말 어린 유묘일까? 아니면 그냥 이게 다 자란 것은 아닐까?’
어쩔 수 없는 한국인 유전자를 가진 것인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서둘러진다. 이 작은 유묘들이 내 기대보다는 무척 더디고 느리게만 자라는 것 같아 새로운 이파리 하나를 기다리는 것이 한 계절을 몽땅 써버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유묘를 키우고 부터, 길을 걷다 매일 마주하는 풀, 나무들이 내 눈에 띄었다. 매일 걷는 길에서 보는 식물들이라서, 나에겐 너무나 익숙해 눈에 잘 띄지 않던 이웃같던 식물들이 어느날 부터인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키가 큰 나무, 울창한 덩굴과 풀을 가진 숲. 너무나 광활하고 가득차있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해보여서 원래부터 지금 그 자리에 지금 모습으로 있었을 것 던 숲이고 키큰 나무였는데, 작은 유묘를 키우고 나니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행운과 생명력이 들어 있을지 깨닫게 되었다.
남편과 길을 걷다가 나보다, 남편보다 더 큰 나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집 베이비 식물들이 이 정도로 크려면 거의 반백년은 걸리는거 아니야? 우리집 식물들이 이 정도로 크려면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되겠네? 그럼 알고 보면 이 나무들도 거의 백 살이 넘은건 아닐까? 우와. "
내가 옆에서 걸으며 이 나무를 보고, 또 저 덩굴을 보고 놀라서 혼자 주저리 주저리 이렇게 말하고 놀라고를 반복하면 남편은 옆에서 지나치는 나무에게 "안녕하세요 나무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나무할머니"라고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어른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면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분명히 알게 되고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여전히 나는 아이를 키우지는 않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아주 조금은 내가 작은 유묘를 키우며 느끼는 이런 생각들이 아닐까 싶었다. 식물을 키운다면, 그것도 아주 작은 식물인 유묘를 키운다면 이미 다 성장해버린 커다란 식물들은 굳이 다 알려주지 않는 그 성장에 대한 비밀, 시간에 대한 인내심과 그 시간을 버티고 자라나는 생명력에 대해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가치들이 어렴풋이 이해가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조금씩 식물 감수성이 함께 자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작은 식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 작고 앙증맞은 이파리의 크기와 지극히 현실적인 소박한 사이즈의 사는 공간이었다면, 유묘들과 보낸 시간이 조금은 길어진 지금은 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변한 내 모습이 조금 더 마음에 들어서, 식물 감수성이 조금 더 늘어난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가 아닐까 싶다.
너무 섬세해져서 모든 것에 예민해지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매일 보기 때문에 특별할 것 없이 느껴지던 집 앞의 커다란 나무들에게 가끔이라도 경외로운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은 요즘처럼 사람들과의 만남도, 활발했던 일상도 제약이 많은 시기에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렇게 커다란 나무들 속에 숨겨진 시간과 인내와 성장을 알게 되면 그 일상의 나무들이 내가 우울하거나 지칠 때 다시 나를 일으켜주는 소소한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왜 '버팀목'이라는 말이 있는지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본다. 사전 뜻에 따르면 버팀목이란 ‘외부의 힘이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크기가 클수록, 무언가가 많을 수록 더 큰 힘을 주는 것도 있겠지만 힘이 되는 것들은 크기나 개수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 작은 식물들을 통해 나는 배워간다. 아주 작은 취미라도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버팀목이 될 수 있고, 나에겐 지금 작은 식물들이 그런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