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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pr 19. 2021

에필로그_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서른 다섯, 스물다섯의 봄날

뇌출혈을 겪고 난 뒤, 나에겐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 중 알아챌 수 있는 한가지가 생겼다. 바로 뇌출혈을 겪었던 사람들만 알아챌 수 있는 누군가의 불편함이었다. 인도에 다녀온 뒤, 그럼에도 당장에 현장에서 예전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현실과 부딪친 뒤, 차라리 마음을 고쳐 먹었었다. 기왕 이렇게 된거 그동안 시간 없다고, 바쁘다고 하지 못했던 하고 싶던 것들을 가득 채워 버킷리스트를 이어가보겠다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웹디자인을 배워보는 것이었다. 덕분에 태어나 처음 찾아간 작은 컴퓨터 학원에서 열명 남짓한 사람들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수업 첫날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문득 그녀의 손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미세하게 불편해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순간 순간 손이 자기도 모르게 안쪽으로 움츠러 드는, 미세한 마비 증상이 내 눈에는 보였다. 혹시나 초면에 불편한 질문이나 관심이 될 수 있을까 싶어 한참동안 나는 물어보지 않았고, 시간이 한참 지나 두 달이 될 즈음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들을 충분히 나눈 뒤에야 물어보게 되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그녀는,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것에 무척이나 놀라워 했는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친구들 중에선 스물다섯에 뇌출혈처럼 큰 병에 걸린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이렇게 작은 컴퓨터 학원에서 열명 남짓한 학생들 중 무려 두명이나 그것도 또래의 같은 경험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나쁜 경험이든 좋은 경험이든 같은 경험을 갖고 있는 그 낯선 사람을 한순간 가족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다. 나의 경험을 나누며 자연스레 그녀도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어린 고등학교 2학년때 갑작스레 뇌출혈이 왔다고 했다. 여느때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뇌출혈이 왔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부모님들이 늦은 시간 퇴근해서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 치료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나와는 달리 18시간이란 오랜시간의 수술을 하고도 예전처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녀는 여전히 한쪽 손과 몸의 일부분이 미세하게 굽은채로 굳어지게 되었고 말도 조금 어눌어지게 되었다.


문득 처음 퇴원을 하고 난 뒤 방문했던 진찰실 앞에서 마주쳤던 꼬마 아이가 떠올랐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뇌출혈이 왔었다는 그 아이는 그 때 다시 완치 판정을 받았을까? 뇌출혈이라는 어찌보면 짧지만 그보다 더 강렬할 수 없던 어두운 터널의 시간을 지나며 나는 왜 나에게만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내 주변 사람들의 모든 안타까움과 동정을 다 받았던 내가 무척이나 불운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여전히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불운했다라고 말을 해주는 사람들 만큼이나 그나마 이정도라 다행이라며 그래도 나는 정말 행운이 있었다며 위로해 주는 분들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의 아픔을 온전히 마주하고나니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비슷한 아픔을 겪어봤다는 나의 과거의 경험덕분에 그들의 이야기를 더 오롯이 듣게 되었고 그제서야 나에게 그럼에도 행운이 있었다는 말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불운도 갖고 있었지만, 또 알고보니 행운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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