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선인장 Aug 07. 2023

김삼순, 오해영 언니들의 마음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됐다

왜 사랑한다고 말을 못 해?

[이 글에는 또!오해영 드라마의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릴 적 명절이 되면 대가족이 함께 할아버지의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보냈다. 엄마는 6남매 중 한명이었는데 명절을 지낼 때마다 이모나 삼촌이 그 해 결혼을 하면 새로운 식구들이 더해져 언젠가부터는 기본적으로 12명의 어른들, 여섯 커플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릴 적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 속 커플, 연인들이라고 하면 연인들의 대화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행동은 뭔가 비슷해 보였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된 거지만 대중들이 좋아하는 드라마와 영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플롯을 완벽히 반영하기에, 그래서 커플들이 비슷해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어릴 적 나는 사랑하는 연인들이라면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제한된 이미지 같은 것들이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졌던 것 같은데, 그런 이미지만 생각하고 삼촌과 이모들의 커플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중 내가 제일 궁금하면서도 실제로 물어보지 않았던 것은 우리 삼촌과 숙모가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일까였다. 어릴 때 나는 정말 신기하게 삼촌과 숙모의 대화를 바라봤었다. 삼촌과 숙모의 대화는 얼핏 보면 싸우는 것 같았다. 분명 내가 보기에는 싸우는 것이 맞는 톤과 어감인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그 두 분 사이에서 싸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배 터지게 같이 웃다가 갑자기 화냈다가, 또 누구보다 로맨틱했다가 또 차가운 그 대화가 분명 다른 어느 커플들의 대화보다 재미가 있어서 계속 지켜보게 만들었지만 나는 감당을 할 수 없는 에너지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정말 두 분이 싸우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분을 관찰한 기억이 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그 커플만의 대화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만약 그런 대화법을 쓰는 사람을 만났다면 금세 얼굴을 붉히고 정말 싸우게 돼서 헤어질지도 모르지만, 두 분에게는 그런 긴장감과 유머와 열정이, 그게 맞아서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 오해영의 드라마 속 커플이 그랬다. 결혼도, 연애도 하기 전에 봤던 이 드라마는 결혼을 하고, 또 외국에서 살면서 다시 보니 또 다른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물론 방영했을 때 처음보고 거의 7년 만에 다시 본 드라마인데도 도경과 해영의 말투는 여전히 나에게 세게 느껴졌다 (물론 나중에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예쁜 말들만 하게 되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외가 식구들의 커플들이 그렇듯 각각의 커플마다 그들이 좋아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말투가 있어서 나에겐 세게 느껴지는 말투지만 아마 해영과 도경에겐 그게 서로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대화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며 새삼 발견한 부분이었지만 로맨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18부 드라마 회차 중 17회, 그러니까 마지막에서 한 회를 남겨두고 나오는 드라마는 또! 오해영뿐이지 않을까 싶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남주인공이 앞에서는 말을 그렇게 해도 뒤에서는 얼마나 후회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들을 모두 볼 수 있어서 감정이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막상 오해영의 나이가 직접 되고 내가 정말 그런 사람과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진짜 답답하고 어려워서 못해먹을 것 같은 연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참고 아껴서 뱉어낸 사랑한다는 말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오랜 감동이 되지만 다른 누구에겐 너무 아껴서 듣지도 못해 끝나버릴 언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언어는 그 커플들마다 모두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이제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드라마에서 정말 많았지만 지금은 데이트 폭력 등의 연관으로 많이 줄어든 벽키스 장면도 마찬가지다. 사실 외국에선 워낙 다양한 성적취향들이 있기 때문에 강압적인 벽키스도 누군가에겐 강압적이게 보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는 정말 좋아할 수 있는 취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벽키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벽키스를 해도 다른 사람이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장면이 드라마에서 잘 보이지 않았고, 여자가 싫다고 해도 결국 그렇게 강제로 키스를 해서 서로의 사랑이 이어지는 장면이 더 많았기 때문에 여자가 싫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좋다는 의미로 왜곡시킨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또! 오해영의 워낙 유명한 장면이었으면서 동시에 논란도 있었던 벽키스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는 보이는 대로 로맨틱하게만 보이다가 또 강압적으로만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나의 취향은 아니지만, 어떤 커플들에겐 그들의 취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벽키스 장면을 없애기보다는 벽키스를 시도하는데 한 사람이 싫다고 말을 해서 오히려 키스를 멈추거나, 아니면 너무 좋아해서 다양한 벽키스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건전하고 자유로운 연애생활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어릴 적 봤던 '내 이름은 김삼순'을 떠오르게도 하는 또 오해영의 주인공들은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츤데레스러웠으며 조연들의 맛깔난 감초 연기와 유머 역시 여전히 재밌게 드라마를 완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또 오해영은 분명 이번에도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맞지만, 삼순이 언니 드라마를 봤을 때는 이해되지 않던 그 시절 어린이들이 삼순이 언니 나이가 되고 나서야 삼순이 언니의 마음을 이해가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해영이의 나이가 되고 연애도 하고 결혼을 하고 나니 또 새롭게 보이고 느끼는 것들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 남편과 살면서 나도 새롭게 느끼게 된 부분이었지만, 남편은 보통 한국 로맨틱 드라마의 썸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남편이 한국의 썸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츤데레적인 면인데, 예를 들면 선물을 준비해서 한다는 말이 "오다 주웠어", "집에 있던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마음 풍성하게 담아서 선물을 사놓고 왜 말은 그렇게 하며, 그 말에 어떻게 상대방은 감동을 받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외국인 남편에게 한국의 깊고 넓은 "오다 주웠다"라는 말의 의미를 나름대로 설명한다고 했었는데, 이해는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나 보다 하고 그가 받아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엄마의 생일날, 남편이 "장모님께 생신 선물 드릴 때 '오다 주웠다'라고 말해야 해?"냐고 물어서 빵 터진 적이 있었다. "오다 주웠어"라는 말을 연인 간에는 할 수 있어도 왜 장모님이나 시부모님께는 할 수 없을까? 이걸 남편에게 설명하려고 하니 두 마음 모두가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되지 않는 것도 같았다. 내가 혼자 일방적으로 부적절한 상대방을 스토킹 하는 것이 아니라면, 서로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왜 사람들은 굳이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싶어 하는 걸까? 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걸까? 그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나는 예쁜 마음이라면 언제든 표현해주고 싶다.


또한 캐릭터 혹은 성격이라는 포장으로 고함을 치는 것은 이제 잘 와닿지가 않는다. 해외에 사는 기간이 늘어나며 외국인 친구들 중에는 종종 내가 처음으로 만나는 한국인인 경우도 있었는데, 한 번은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보는 친구의 부모님이 나에게 너는 한국인인데 왜 드라마에서처럼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야기하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한국 드라마만 보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데 외국 드라마들을 함께 보면 우리나라에서 유머라는 이유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권력이라는 이유로 특히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지금 뉴스를 가득 채우는 폭력의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이런 말투, 목소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더 사랑해서 소리를 지르고, 더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더 가깝다고 소리를 지르고, 더 멀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그게 가족 앞에서든, 길거리에서든, 공식 자리에서든, 사석에서든 우리가 정말 이렇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지, 그 일이 그렇게 소리를 쳐서 해결될 일인지, 왜 소리를 쳐야지만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나라 말에 '죽인다'라는 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머 속에도 있었고, 사랑 속에도 있었고, 그래서 일상에서도 많았다. 물론 숨김없고 직설적인 캐릭터들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화장실에서 앉아서 소변을 보지 않으면 죽인다라는 농담부터 매일이 오늘 죽어도 좋을 만큼 좋다, 또는 이렇게 오늘처럼 좋은 날엔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대사가 있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더구나 나는 해외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막들을 함께 보는데 그 자막이 보통 영어나 독일어 자막이다. 그렇게 "죽는다"라는 말을 외국어 자막들과 함께 보니 새삼 우리나라가 "죽는다, 죽인다, 죽었어" 등 센 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말들을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을 하면 굳이 "죽다, 죽는다"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단어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죽인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일까? 언어는 사회를 반영한다고 하는 말을 외국을 알아갈 때 떠올려보곤 했는데, 한국 드라마를 외국에서 보면서 또 바깥세상에서 한국 뉴스를 듣게 되고 나니 더욱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해서 별생각 없이 쓰는 단어들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사석에서뿐만 아니라 공석, 회사에서도 개인사가 오르내리고 누군가의 외모로 편견을 가지고 업무를 평가하거나, 동명이인이라는 오해로 결혼식이 파혼되는 누군가의 크나큰 아픔을 그저 사람들의 수다거리, 웃음거리로 놀려대는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일지 해외에 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더 큰 수치심이 들고 분노가 생기고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언제나 사회가 더 가까워야 세상이 따뜻해진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우리나라보다 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모여사는 나라들을 보면 오히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거나 혹은 무관심, 무신경해야 오히려 더 별 탈 없이 잘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방영당시에는 오해영의 어머니가 한국인의 대표 엄마상으로 이야기가 많이 되었던 것 같은데, 2020년대가 되어 다시 보니 엄마가 서른이 훨씬 넘는 딸의 지극히 개인적인 연애생활에 직접적으로 개입이 되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물론 결국엔 자식 편에 서고, 또 힘들 때 위로도 가장 해주지만, 드라마 속 어머니들은 연애기간 상대방에게 따로 직접 연락을 하기도 하고, 당사자들은 만나고 싶어 하는데 반대를 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결혼 날짜도 잡아버린다. 모두 부모님의 사랑으로 표현되었고, 또 한국인 자식들이라면 그 부모님들의 마음을 외국인 남편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지만, 이렇게 부모님들에 대한,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넘치는 사회이슈들을 떠올려보면 한국 부모님들의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바른 방법이고 옳은 결과를 가져오는 방식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이 드라마를 다시 꺼내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이석증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이석증을 걸리기엔 너무 젊다고 말했는데, 이 말, 그리고 이 어지러움을 나는 예전에 듣고 겪어본 적이 있었다. 딱 12년 전, 그러니까 내 두 번째 토끼해였던 24살에 들었다. 그때 뇌출혈이 갑자기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나는 분명 병원에서는 괜찮아지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어지러웠고, 그 병을 겪기엔 너무 어리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때 나 빼고 모두 고령의 할머니들만 계시는 6인실 병동에 있는 동안 어떤 간병인 분이 뜬금없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여기 할머니들이 먼저 가실 것 같지? 아닐 수도 있어. 늙으면 회복도 느리지만 반대로 악화되는 것도 느려져.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빨리 낫기도 하지만 빨리 위급해지기도 하지."


그날 밤, 모두가 잠든 밤 문득 잠에서 깨어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복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반사돼서 유리창에 비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창문에 비친 내가 갑자기 병실의 할머니들처럼 7,80살은 되어 보였다. 내가 지금 죽으면 뭐가 제일 후회될까 떠올려봤다.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가보고 싶었던 대학원,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인간 관계에 대해선 환영했지만 이성관계에 있어서은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싫었고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물도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뭘 하다 죽으면 잘 죽었다고, 죽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니 가장 흔한 것이 사랑 같았다. 아니 정말로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 모든 것, 말하고 보고 듣고 즐기는 그 모든 것에 사랑이 있었는데 나는 그걸 해보지 않고 죽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내가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보면 가장 죽음을 가깝게 느낀 순간에도 나는 어떤 사람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사람이 누가 될까를 궁금해했고, 사랑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죽음이 따라오게 되었다.


또! 오해영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 누군가에 대해 전혀 어떤 단서도 가질 수 없었고, 이 드라마를 다시 보는 지금 나는 그 누군가 옆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이 드라마를 봤을 때는 오해영이라는 여주인공, 그리고 미래의 한 장면을 매일 보게 되는 능력에 대한 스토리가 중심으로 보였다면, 이번에는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을, 결혼을 말해도 되는지 두려워하는 남주인공 도경의 마음이 더 바라보게 되었다. 도경 캐릭터 자체는 이야기할 소재들이 다분하지만 내가 이번에 마음이 끌렸던 부분은 바로 그가 죽음과 사랑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해영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멀지 않은 순간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망설인다.


신기한 것은 결과를 모르고 보는 1회 차 시청에선 그런 도경의 마음이 이해가 됐는데, 드라마를 두 번째 보는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 켠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는 교통사고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실 꼭 그 교통사고가 아니라도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생각보다 정말 오랜 세월 뒤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미룰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죽을지도 우리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여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병에 걸려 죽게 되는 영화 Walk to remember를 보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먼저 죽을 수도 있으니 상대방에게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다음 If Only라는 영화를 보며 처음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런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는 순간을 겪고 난 뒤, 나는 처음 연애를 한 친구와 결혼도 하게 된 것이니 도경이가 하는 말, 고민들을 내가 남편에게도 자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도경이 죽는 것은 이제 무섭지 않은데 더 줄 수 있는 사랑을 주지 않았고, 마음껏 줄 수 있었는데 안 줬고, 그렇게 팍팍하게 군 자신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서 후회하는 장면들을 보며, 나는 오히려 내가 정말 남편에게 자주 그리고 많이 그것도 모자라서 무척, 정말, 매우, 아주, 진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드라마가 끝나기 바로 직전, 17회에 처음 여주인공에게 꺼냈던 사랑한다는 말을, 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남편도 나도 누가 언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 넉넉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어 단어를 잘 모르는 남편도 '아주, 정말, 너무, 무척, 매우, 진짜'의 형용사는 물론 '참'이라는 단어까지 잘 알고 사용한다. 그 형용사들이 똑같은 사랑이라도 얼마나 풍성하고 꽉 채워서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지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돈을 많이 벌어 본 적이 없었다. 대신 돈이 없어도 마음이 꽉 채워질 수 있는 방법들을 많이 배웠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엄마와 친척들에게 배웠고, 현장에 있는 가난한 나라들의 사람들과 친구, 선배들을 만나며 배웠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아주 비싼 선물이나 화려한 코스 음식 같은 것을 초대하진 않지만, 대신 그가 아주 많이 정말 무척 진짜 너무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잊지 않게 표현한다. 그래서 초반에 남편은 내가 어디 멀리 가는지, 혹은 곧 죽는지를 초조하게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잘 알게 된 남편은 이제 그도 나에게 아주 듬뿍 형용사를 붙여 예쁜 말을 사용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꽃다발이나 선물이나 명품을 주고받진 않지만, 그리고 여전히 정말로 세상에는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이게 정말로 내가 견딜 수 있을만한 아픔이고 시련인가 싶을 정도로 무척 힘들다. 게다가 죽음에서 벗어난 경우에도 이게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지금 살짝 잠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문득문득 그 순간이 갑자기 나에게 혹은 내 주변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싶어 순간순간 극도로 두려워지기도 한다. 이렇게 남들보다 먼저 더 선명하게 죽음을 경험해서 남들은 잘 겪지 않는 고통과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반대로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존심 같은 부차적인 이유 때문에 사랑을 듬뿍 표현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드라마에서 도경은 자신이 아무리 해영을 사랑해도, 해영이 자신이 죽는 것을 알면 과연 그녀가 웃을 수 있을까 두려워한다. 그걸 보며 나는 반문했다. 그러니까 지금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생각하며 나는 남편에게 또 뜬금없이 나를 아주 많이 정말 무척 너무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언젠가 또 찾아올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더 많이 같이 웃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