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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비, 오롯이 혼자 걷는 시간

by 드작 Mulgogi

CAMINO DE SANTIAGO

Carrion de los Condes/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16 Day / 2016.07.20

: 26.80km(Iphone record : 33.10km)



천사 수녀님들의 산타마리아 성당을 떠나 한적한 마을,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로 가는 길에 나비 한 마리가 길 위에 앉았다. 순례자들이 지나다는 데도 꿈쩍도 않는 하얀 바탕의 알록달록한 나비. 순간 날개를 다친 건 아닐까. 죽은 걸까, 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사진을 찍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제야 훨훨 날아오른다. 다행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길, 그리고 베드 버그의 시련도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이리라 여기는 여유마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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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에 도착했다. 수돗가에 찬물도 콸콸 나오는 알베르게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 스페인 태양은 더욱 작렬하여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의 비장함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만 못한 법. 컨디션 조절 잘 하면서, 베드 버그를 박멸하고 퇴치해야 한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만큼. 작렬하는 태양만큼. 베드 버그와 싸워야 하는 나의 마음도 그에 못지않게 활활 타올랐다.


한데 베드로와 휘는 이곳에서 6km 나 더 떨어진 Sahagun (사아군) 까지 가겠다고 한다. 이미 27km나 걸었는데 이 무더위에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말리고도 싶다. 하지만 말리지 않기롤 한다. 이제 일행들과 떨어져 걸을 날이 왔구나 싶었다. 게다가 베드 버그에 물린 나와 동행하다가 자칫 짐을 통해 베드 버그가 옮기라도 한다면, 일행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말리지 않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인사를 했다. 왠지, 또 마지막은 아닌 것 같아서 작별인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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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잘 드는 큰 창에 흰색 침구가 놓인 쾌적해 보이는 방에 머물게 되었다. 8인실 도미토리 룸에 아직 투숙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 행운이 겹쳐 이대로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면. 혼자 이 넓은 방을 싱글룸으로 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우선 샤워를 좀 하자. 찬물로 후다닥 샤워를 하고 보니. 세상에나! 요즘 베드 버그가 내 혼을 쏙 빼놓아 그런지. 수건을 챙기지 않아서 적잖은 당혹감이 몰려왔다. 옷으로 닦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는 찰나. 밖에서 발랄한 목소리의 한국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저기, 혹시 수건 좀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 하고 SOS를 쳤다. 그는 길 위에서 길 위의 같은 숙소에서 여러 번 머문 적 있는 전도사 C의 일행 중 한 명인 J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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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귀여운 함박웃음을 가진 목소리가 밝고 시원시원한 아가씨다. J 덕분에 무사히 샤워장을 나온 나는 다시 전쟁을 치렀다. "베드 버그,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두 주먹 불끈 쥐고서. 옷을 빨고, 소지품을 햇볕에 소독했다. 나의 모양새가 수상했는지. 스페니시 아저씨들이 팔에 물린 게 뭐냐고 물었다. 순간 베드 버그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까 봐 내심 걱정하며 겸연쩍으면서도 솔직하게 "이거, 베드 버그라고." 털어놓았더니. 웬걸. 그들은 오히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옷이랑 신발을 새로 사라고 했다. 그리 비싸지 않으니 새 걸로 사라고 일러준다.


모든 세탁과 소독을 일사천리를 진행하고서야 한숨을 돌리고, 수돗가에 앉았다. 한국에서 온 장차 목사님이 될 전도사 C와 Y 그리고 J 가 이미 수돗가에 주르륵 자리를 잡고 앉아 족욕 중이다. 전도사 Cㅡ 우리 일행은 그를 전도사님이라 불렀다. 처음 길에서 만났을 때, 그는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꽃무늬 몸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제야 말이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틱 대신 길에 버려진 나무를 스틱 삼아 들고 다니는 그가 수상해(?) 보이기 마저 했다. 흡사 도인 같기도 했고. 한데, 이야길 나누다 보니 영성이 충만한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특히 여자 친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산티아고를 꼭 여자 친구와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ㅡ


여하튼 나도 고생한 나의 발가락 군들을 찬물에 담그며 지친 영혼에 휴식을 주었다. 작렬하던 태양도 한풀 꺾인 모양으로 열기가 식어가고 있어 나른한 오후다. 그때. 베드로가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더위에 지친 표정이 역력한 채.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아니,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더니 선글라스를 알베르게 식당에 놓고 갔단다. 아이코, 세상에나. 휘는 이미 사아 군을 향하고 있어서 의리상 베드로도 선글라스를 챙기고 다시 길을 재촉할 요량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들 너무 무리한다 싶다. 그래도 어쩌랴. 그들의 인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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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를 보내고 아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한창 족욕 중인데. 전도사님이 조심스레 내게 "그런데 등에 뭐가 묻었네요."라고 한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스치는 가운데. 한국에서 직장에 다닐 때, 한 여름 퇴근길이 떠올랐다. 버스 정류장에서 갑작스레 하얀 새 똥이 내 팔에 떨어진 적이 있는데.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또 너무 웃긴 에피소드. 애써 침착하며 새똥을 맞았으니 행운이 따를 거야,라고 말했는데. 스페인에서도 새똥을 맞을 줄이야.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주님,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죠?' 하고 웃고 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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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똥 에피소드를 뒤로 어느덧 저녁이 되고, 혼자 싱글룸을 쓸 기대감은 2명의 순례자가 머물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북아일랜드에서 왔다는 카라와 메리. 나도 아일랜드에서 왔다면서 일단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둘은 얼마 전 대학을 졸업했고, 카라는 곧 런던으로 가서 변호사로 활동할 계획이고, 메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두 친구의 마지막 함께하는 휴가라며. 부쩍 아쉬움과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다. 둘의 산티아고에서의 추억은 서로 다른 곳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시련이 닥쳐올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어느덧 밤이 찾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간 누적된 피로감에 아침 6시 30분까지 푹 자고 일어났다. 카라와 메리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 나는 이왕 늦은 거 느긋하게 알베르게에서 아침까지 챙겨 먹고, 거의 8시가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쾌적한 숙소에서 묵으며 심신의 안정을 취하고 족욕을 한 덕분인지 컨디션이 꽤 괜찮다. 레스토랑 스태프 아주머니가 참 친절했는데, 좀 더 이야기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쉬움은 뒤로 다시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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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다. 산티아고 여정을 시작 후, 일행과 떨어져 오롯이 나 홀로 걷게 되는 아침이다. 오늘따라 아침 볕이 더욱 아스라히 눈 앞에 번진다.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왠지 모를 가슴 뭉클함에 함께 하는 모든 풍경을 열심히 주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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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만나는 첫 번째 마을, MORATINOS 에는 아담한 교회가 하나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온 도미닉 신부님은 며칠 동안만 이곳에 머물며 순례자를 위한 접견 봉사를 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이 그를 행복하게 한다고 했으며,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만나는 건 대단하다고 하며 기꺼이 사람책으로 읽혀 주었다.


일행과 함께 걸을 때보다. 혼자라 더 많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혼자라 길거리 위의 풀 하나 꽃 하나 곤충 하나에도 감동이다. 또, 혼자라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주어질 것이었다. 아무튼 혼자 걸어보는 첫 날의 기분은 꽤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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