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라고 쓰고 우울증 대처기라고 읽는다.

존 뮤어 트레일을 통해 배운 점.

by Noelles Adventure

존 뮤어 트레일 여행기는 내가 우울증을 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존 뮤어 트레일을 하게 된 계기를 보면, 내가 우울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글은 여기.






난 과거의 찬란하게 빛나던 태양 같던 나를 늘 그리워하고, 무기력한 내가 싫었다. 그리고 우울증을 겪지 않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했다. 약 8년 동안 과거의 나를 그리워했다. 누군가가 내게 과거의 너 자신과 지금의 나 자신 중에 택하라면 고민 없이 과거의 나를 택했을 거다. 어떻게 하면 다시 과거의 나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혹시 아름다웠던 내 모습은 이제 다시 찾을 수 없는 걸까. 8년 동안이나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니까 얼마나 괴로웠나. 눈뜨면 없어라에 나오는 "한길아, 어떤 때의 시련은 큰 그릇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러뜨려 놓기가 일쑤란다"라는 글귀에 대성통곡을 하며 내 삶은 이렇게 찌그러진 상태로 살겠구나 생각했다. 넘어진 겸에 쉬어라 가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토록 오래 쉴 줄을 몰랐다. 이러다 평생 넘어진 채로 사는 거 아니야? 인생은 고통이라는 생각이 매일 들었다.



찌그러진 내 그릇이 조금 펴지기까지 무려 8년이나 걸렸다. 참 감개무량하게도 이런 시련을 통해서 내가 더 깊어지고 내가 단단해졌다고 느꼈고, 그렇게 성숙한 지금의 내 모습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최근 들어서. 처음으로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지 않게 됐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지금의 내가 없겠구나 싶으니까.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우울증이 있다는 것은 나의 치부라고 생각했고, 숨겨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한국인들한테는. 외국인 친구들에게는 사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는데 한국에서는 우울증이라서 정신과 다닌다고 하면 정신병 있는 것처럼 보니까. 나도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우울증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래서 내 우울증에 대해 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은 누가 이 사실을 안다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내 우울증이 점점 호전되고 있다는 증거기도 할 거고, 내가 그만큼 단단해지고 있다는 증거기도 하다. 행복하다. 이렇게 찌그러진 내가 점점 펴질 수 있다는 것이.






약 2년 전쯤 존 뮤어 트레일 종주기를 한 카페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 종주기를 올리면서 사족을 몇 개 달았는데, 그때 사족을 첨부한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정신과를 다녀왔다. 2년 반 동안 내가 아무리 내 의지로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우울증이 낫질 않아서 드디어 정신과에 다녀왔다. 2년 반 전에 나는 이사를 왔는데, 그 뒤로 지금까지 나는 운동도 (하기 싫고 귀찮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꼬박꼬박 했고, 나름 (정말 싫고 귀찮았고 의미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새 친구들도 사귀려고 여러 모임에 기웃거려 보이기도 했다. 연애도 나름 안정적으로 하고 , 전에 살던 동네 친구들이랑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같이 여행도 다녀오고, 상담치료도 자주 받았다. 하도 일에 집중을 못하고 할 일을 제대로 못해내고 그러다 보니 계속 자책하고 자기 비하를 하게 돼서 이걸 좀 타개해보려고 일 같이 하는 그룹도 신청해서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명상수업도 신청해서 명상 수업도 정기적으로 나갔다. 겨울이 돼서 해가 짧아지니까 우울증이 더 심해지길래 블루 박스 (햇빛을 모방하는 램프)도 사서 매일 30분씩 쬐고 그랬다.



나는 정말 우울증을 스스로 이겨내 보려고 열심히 했다. 근데도 낫질 않았다. 나는 정말 할 만큼 다 했다. 오늘 정신과에서 접수하고 상담받는데 간호사가 그러더라. 정말 개인이 병원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 같더라고요. 병원에 잘 왔다고 하더라고요.



우울증 진단을 위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내 장점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더라? 장점을 생각해봤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persevere 한다는 거였다. (한국말로 뭐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끊기가 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좀 끝까지 버티는 편이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처절하게까지 아등바등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고 그게 장점인 거 같다고 얘기했다.



근데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아 이게 우울증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절대 장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의지가 강한 사람이고,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고 뭐든지 하는 사람이기에 우울증도 내가 열과 성을 다해 내 의지를 힘껏 발휘하면 우울증도 낫는 줄 알았나 보다. 정말 오만하기 짝이 없다. 아니 병이 뭐 내가 열심히 한다고 나을 리가 없는데, 그걸 의지로 극뽁!해보겠다고 2년 반을 개고생을 해온 거다. 와 내가 왜 2년 반이 지나서야 병원에 발을 디밀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이 산행을 완주한 걸 보고 사람들은 내가 매우 강인하고 의지가 강하다고 칭찬을 많이 해줬다. 근데 이렇게 강하고 의지가 센 나 같은 사람도 우울증은 혼자 못 이겨내는 병이다. 혹시 우울증이 있으시면 혼자 어떻게 의지로 해보려고 하시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이겨내기 정말 힘든 병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울증은 꼭 우울하다는 느낌 혹은 자살 생각이 들어야만 우울증인 게 아니다. 난 우울감은 진심 한 톨도 없고 자살 생각도 1도 없었다. 대신 나는 무기력감이 어마어마했다. 침대 밖으로 나오기가 싫고 샤워같이 간단한 일도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버겁고 귀찮고 힘들었다. 일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집중을 못하고 하루 종일 인터넷을 떠돌면서 허송세월 보내고. 그리고 그런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이고 게을러 보여서 자꾸 스스로를 미워하게 됐다.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지만...



암튼 나는 오늘 스스로 정신과에 찾아간 것이 매우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오늘은 접수만 한 건데도 기분이 좋다. 내일 의사랑 만나서 약을 처방받을 거 같다.



내 여행기는 꼭 완주하겠다.


2018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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