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나를 증명해 보이지 않겠다.

자존감도 결국엔 판단이다.

by Noelles Adventure

내가 존 뮤어 트레일 (John Muir Trail, JMT)를 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묻는 질문이 대개 3개다. 첫 번째는 혼자갔어? 두번째는 안 무서웠어? 세번째는 가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acific Crest Trail, PCT)도 할거냐?는 질문을 받는다. 책, 영화로 나온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를 본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게 마련이다



아직까지는 PCT를 그닥 하고싶은 생각은 안 든다 (적어도 팬데믹 전까지는). 첫번째 이유는 내가 뮤어 트레일 (JMT) 하려고 동기가 이제 더이상 안 먹힌다. 이제 힘든 일을 해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해 내고 싶은 욕구가 잘 안 든다. 굳이 내가 저걸 해내서 증명해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저걸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좀 생긴 것 같고. 설사 그런 믿음이 없더라도, 이렇게 챌린지를 일부러 만들어가며 그걸 극복해내는 방식으로 자신감을 찾는 방법이 과연 나에게 최선일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감을 찾고 싶지가 않다. 우리 언니 말을 빌리자면, 지금껏 나를 증명해보이고자 했던 대상은 내가 아니라 엄마, 아빠, 선생님, 엄마 친구 딸이었다. 나는 더이상 이런 챌린지를 통해서 나를 증명해 보이지 않겠다.



그렇다고 이제 어케 자신감을 찾아나갈지 아는 건 또 아니다. 그치만 하나 알게 된 것은 나는 self-compassion을 지향하는 삶을 살고 싶다. 자신감도 아니고 자존감도 아니고. Self-compassion은 우울증 때문에 시작한 내가 교수로 있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명상 수업에서 배웠다. Self-compassion을 갖는다는 건, 말 그대로 내 스스로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스스로를 보듬어주고 사랑해주고 스스로에게 관대한 자세를 일컫는다. 나는 emotionally intelligent (떼라피스트가 나를 이렇게 묘사한다)한 편인데, 이를 왜 나 스스로에게는 적용하기는 이렇게 힘든걸까? 남이 무슨 일을 겪었을 때 얼마나 힘든 건지 compassionate하게 공감해주면서 왜 내가 힘든 일을 겪었을 때는 한없이 내 스스로에게 매정한건지. 남에게는 "그래 힘들었지. 당연히 그런 상황이면 누구나 힘들지. 이건 그 누구였어도 힘들었을거야. 많이 고생했어"라고 잘 말하고 실제로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내 스스로에게는 "이것도 못해? 왤케 약해빠졌어?"라고 나를 괴롭혔다. 많이 고치고 있지만 지금도 가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습관이다. 그럴 때면 의식적으로 내 스스로를 불쌍히 어여삐 여겨주려고 노력한다.



요즘 자존감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는데, 자존감도 결국에는 판단이다. 내가 나를 판단하고 judge했을 때 어떻게 느끼느냐가 자존감이다. 근데 내가 나를 그렇게 꼭 판단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판단하기 이전에 "그래 정말 힘들었지. 어떻게 그런 일을 그래도 잘 버텨서 아직까지 잘 살아있니 참 대단해"라고 내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렇게 앞으로 나를 돌보며 살고 싶다. 자신감을 키우고 자존감을 키우는 건 나에게 더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다.



두번째는 여행이 장기가 되면 여행하는 하루하루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사라지더라. 나는 고작 3주짜리를 했지만, 한 2주가 지나고 나니까 하루하루를 열심히 걷고 열심히 구경하고 열심히 만끽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나머지 날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빨리 걸어서 끝내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보니 웃긴게 초반에는 일기도 길고 막 뭐를 봤고 어디를 지났고 다 자세히 써 있고 스스로도 그게 다 기억이 난다. 근데 후반부로 갈수록 일기도 짧고 뭘 지났는지 뭘 봤는지 이런 것도 안써 있고 스스로도 기억이 잘 안난다.



JMT를 끝내고 나서 든 생각인데 후반부에 이렇게 하루에 대한 존중 없이 마냥 일상과 다름없는(?) 날처럼 하루를 보낼거면, 도대체 이 길을 왜 걷나, 왜 이 시간을 내가 여기서 허비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왜 여행도 바쁜 삶 속에서 어렵게 시간 내서 딱 1주일 다녀오면 막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하루에 뭐했는지 다 기억나잖아요? 근데 장기여행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난 최대로 길게 해본 배낭여행이 3달이라 딱히 장기는 아니지만) 장기로 하다보면 아주 대단하고 위대한 관광지에 가더라도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듯이 ( just like any other day) 그렇게 마구 소비해버리는 날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난 아마 PCT를 하게 되면 얼마 안가서 그냥 음~그렇군 하고 막 하루를 흘려 보내 의미없이 소비해버릴 것 같다.



그래서 아직은 PCT를 하고싶은 이유가 없다. 하지만 팬데믹을 겪으며 만 9달 넘게 재택근무를 하고, 친구들 보러도 못가고, 그 외에 아무데도 못가게 되니 좀이 쑤셔서 그런지 하고픈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만약 미래에 PCT를 하게 된다면, 적어도 하려는 이유가 내가 예전에 JMT를 하려고 했던 이유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달라야하고. 그저 자연이 좋아서 자연을 만끽하고 싶어서 가게 된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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