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평가 좀 그만 하면 안 돼요?
10년 전, 박사 1학년 때 조지와 자존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자존감이란 개념이 딱히 자주 쓰이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그랬고 인터넷에서 보는 글들도 그랬고, 자신감과는 다른 자존감이라는 감정상태를 구분 짓는 것에 꽤 열중했다. 조지와의 이야기에서도 자신감과 자존감을 구분 짓는 얘기로 시작했다. 더 나아가 자신감보다는 자존감에 더 귀 기울이는 것이 뭔가 더 나은 삶의 자세가 아닐까, 본인의 정신건강에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결론지었던 것 같다.
근데 자존감이라는 개념도 결국엔 유행과 같은지, 10년 동안 읊어대고 나니 이제 좀 지긋지긋하다. 뭐만 하면 "어머 그건 걔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웬만한 사람 심리는 자존감 결여로 퉁 쳐진다. 그땐 자존감이 중요했을지 몰라도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심정의 기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 과연 자존감일까? 이 생각은 사실 몇 년 전 학교에서 들은 명상 수업에서 든 생각이다. 존 뮤어 트레일 종주기를 쓰면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다.
자신감 높으면 끝?
난 심리학 전공이 아니므로 정확한 정의에 대해 쓰지 않겠다. 대신 내가 이해하는 자신감과 자존감의 차이를 우선 써 보겠다. 한 6개월 전부터 골프를 배우고 있는데, 참 오랜만으로 뭔가를 열심히 해서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 좀 공이 잘 맞으니까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하죠 흑흑 내가 LPGA 프로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볼까?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난 뭐든지 열심히 하니까 열심히 하면 되겠지. 이게 바로 내 자신감이 아닐까 싶다. 자신감이란 "나는 잘할 거야 나는 잘 될 거야"처럼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높은 감정이다.
자신감의 문제점은 망상이다. 내 나이 만 34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골프를 시작한 내가, 지금부터 10,000 시간을 골프에만 매진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티칭 프로 말고 투어 다니는 프로 골퍼가 될 확률은 매우 낮다. 사실 궁금해서 구글에 검색도 해 봤다. 나이 30에 골프 처음 시작하는데 프로 골퍼가 될 수 있냐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해 놨더라. 답변을 보면 하나같이 그렇다. 가능(possible)은 하지만 그럴 리 없다(not plausable)고. 그러니까 내가 프로 골퍼가 될 확률은 0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확률은 0과 너무너무 가까워서 0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낮은 확률이라고. 내가 지금부터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천재적인 감각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내가 LPGA 프로 골퍼가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0에 수렴한다. 이게 현실이다. 내가 여기다 대고 "아냐 난 할 수 있어! 난 잘할 거야!"라고 자신감을 가진다면, 나는 망상을 하고 있는 거다. 자신감은 내 능력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 객관적인 실질 능력과는 무관하다. 만약 내가 프로 골퍼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면, 그러니까 본인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능력과 객관적인 능력 괴리가 크면, 높은 자신감을 갖고 있더라도 그게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는 감정일까?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내게 독이 되겠지.
자신감 말고 자존감도 챙겨줘.
그래서 보완적인 개념으로 급 회자되고 있는 게 자존감이다. 찾아보니 자존감이라는 개념은 1890년대에 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사람이 처음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내가 이해하는 자존감은, 내가 내 스스로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렸다. 프로 골퍼 예를 다시 들겠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면 "내가 프로 골퍼가 되지 못한다니ㅠ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나는 잘하는 게 없어"라고 생각하겠지. 그치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면 "내가 프로 골퍼가 못 되더라도 내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기 때문에, 아직 내 가치는 크다"라고 판단하겠지. 이 얼마나 훌륭한 마음 가짐인가! 자신감과는 별개로 내 실질 능력이 객관적으로 딸리더라도 내가 가치 없어지지 않는다니! 내가 이걸 못한다고 해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마음 가짐.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개념이에요. 나도 처음 자존감이라는 개념을 접했을 때 "흑흑 그렇지. 내가 이건 못 한다고 해서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은 아니지"라고 정말 많이 위로를 받았다.
자존감이 어려운 이유.
자존감을 높이 가지는 건 정말 어렵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스스로를 평가한다는 점에서 자존감을 높이 가지기는 쉽지 않다. 사람은 어쨌든 사회적 평가를 늘 받게 마련이고, 사회적 평가가 어떻든지 간에 나의 가치를 굳건히 믿는 건 참 어렵다. 마치 내가 제아무리 내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 누구도 내게 예쁘다고 말해주지 않고 그 누구도 내게 연예인 같다 평가해주지 않으면, 내가 내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하기가 쉽겠어요? 화장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미의 대한 욕심보다 귀차니즘이 더 커서 대학교 때도 화장을 일절 안 하고 다녔지만 친구들은 보면 화장을 안 하면 "왜 이렇게 아파 보여? 어디 피곤해?"라는 소리를 하도 듣다 보니, 화장을 안 하면 움츠러든다고 한다. 사회에서 하도 화장을 강요하다 보니 제 아무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예쁘게 평가하려고 해도, 도저히 본인 쌩얼에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거다. 몸매도 마찬가지. 사회에서 요구하는 마른 몸매에 대한 평가가 워낙 잔혹하고 굳건하다보니, 아무리 "내가 뱃살이 나와도 내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판단하려 해도 그런 가치평가는 참 어렵다.
둘째,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무너지면 갑자기 가치 없는 사람이 된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다 그렇겠지만 나는 지금껏 내 가치를 내 능력에서 찾아왔었다. 공부를 잘했고 그래서 박사도 하고 교수도 됐다는 내 능력에 기준해서 내 스로로의 가치를 결정했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결국 내 능력이 부족해서 교수할 정도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치판단의 기준에 됐던 능력이 줄어들고 나니 갑자기 내가 쓸모없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실제로 능력이 줄었든 아니든.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여긴 이유가 공부 잘하고 논문 잘 써서라고 생각했는데, 난 이제 공부도 못하고 논문도 못 쓰는 사람이니까 내 가치는 없어져버렸다.
떼라피스트에게 난 커리어 상 능력이 없어서 내 가치가 없어 보인다고 상담을 요청했다. 떼라피스트는 "넌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고 감수성이 있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깊이 맺을 줄 안다"며 내 감정지능 (emotional intelligence)이 매우 높다고 했다. 감정지능도 정말 가치 있는 건데, 내 가치를 왜 커리어 상의 능력에서만 찾냐고 물었다. 떼라피스트는 자신의 가치를 찾는 기준을 꼭 능력에만 둘 필요는 없다고 했다. 더 나아가 사회에서 수치화시킨 기준 (예를 들면 성적, 직업, 연봉, 몸무게 등)에 따라 내 가치를 판단하지 말고, 수치화되지 않는 더 형이상학적인 가치로 본인을 판단해보라 했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내 감정지능을 단 한 번도 가치 있다고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히려 감정지능이 높은 것이 불행하다는 "난 왜 이렇게 예민할까. 제발 나도 남들처럼 예민하지 않았으면" 이런 마음에서였을까. 난 내 감정지능이 가치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떼라피스트와 1년 넘에 이 문제로 상담을 하고 나서야 드디어 이런 부분에서도 내 가치를 찾을 수 있게 됐다. 그니까 스스로의 가치를 찾는 데 너무 단일한 기준 (특히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만을 삼지 않기를.
근데 자존감도 결국엔 평가다. 내가 나에게 내리는 평가. 나참나 내가 내 자신도 굳이 평가를 하면서 살아야 하나? 사회에서 받는 평가도 모자라서 나까지 나를 평가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리고 스스로의 평가가 낮으면 "난 왜 자존감이 이렇게 낮지 엉엉"하면서 더 나를 괴롭혀야 하나?
학교에서 들었던 명상 수업에서 self-compassion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Compassion이란 남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개념이다. Self-compassion을 갖는다는 건, 말 그대로 내 스스로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스스로를 보듬어주고 사랑해주고 스스로에게 관대한 자세를 일컫는다. 이건 어디 나온 정의는 아니고, 내가 이해한 self-compassion을 표현해 본 거다. 난 이 마음 가짐이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정말 위로가 되거든요. 그리고 더 이상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려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내가 상상하는 혹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내 모습은 이상에 불과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인정해야 self-compassion이 가능하다. 여기서 이상적인 모습을 예를 들면 늘 언제나 어디서나 자존감이 높은 나의 모습,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늘 줏대 있게 사는 나의 모습, 항상 너그럽고 마음에 여유를 가지는 나의 모습, 늘 평정심을 잃지 않는 나의 모습, LPGA 프로골퍼가 된 나의 모습, 포샵이 완벽하게 된 연예인 몸매를 가진 나의 모습 등이 있겠다.
프로 골퍼 예를 다시 들어보자. Self-compassion을 가지면 "프로 골퍼가 되기 힘들다고 하니 속상하고 서운하지? 근데 프로 골퍼가 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야. 정말 특출 난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열심히 훈련해도 될까 말까 하는 걸 내가 못한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 없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다. 흑 감동ㅠㅠ
이번엔 내 커리어 상의 능력 예를 들어보자. "원래 공부 오래 하면 다 스스로에게 회의가 들기 마련이고,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선 주눅 드는 게 당연한 거야. 너가 남들을 보고 위축되듯이, 남들은 오히려 널 보면서 너무 대단하다면서 위축될 거야. 게다가 커리어 능력 말고 다른 너만의 가치를 사람들이 몰라줘서 너무 서운하지."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다. 흑 내가 쓰면서도 내가 감동받는다. 자꾸 이렇게 생각해야지. 암튼 이런 마음 가짐은 자신감과 자존감만으로는 생성되기 힘들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엔 자존감이 낮은 사람 예를 들어보자. "너가 자존감이 낮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돼! 세상에 우리가 혼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남의 평가에 휘둘리게 마련인 게 인간 아니겠니? 이건 너가 속한 사회가 하도 남 평가질을 해대는, 자존감을 높게 가지기 힘든 사회라서 그래. 이런 사회에서는 자존감 높던 사람도 당연히 낮아질 거야. 자존감 좀 낮으면 어때.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 위로를 했으면 좋겠다.
프로 골퍼 예를 든 요약본
1. 자신감: 난 지금 골프를 시작했지만 프로 골퍼 될 수 있다!
2. 자존감: 프로 골퍼 못 되더라도 내 가치가 낮아지지 않는다! 난 다른 걸 잘하니까 훗.
3. Self-compassion: 프로 골퍼 되기 힘든 건 너무 당연한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오늘 일어나자마자 골프 연습 가려고 했는데 너무 귀찮아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골프 예시가 많이 나온다. 이제 골프 연습 가야겠다 따흑... 오늘은 제발 잘 맞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