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 기준도 문화마다 다르다.
한국과 미국이 위생관념이 다르다는 걸 인식하는 데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건 뭐 1주일 만에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꽤 도드라진다. 당연히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고, 이 기준도 시대마다 바뀌게 마련이고, 한 문화에 한 가지 기준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치만 대체로 봤을 때 (예를 들면 평균 혹은 중간값) 가장 흔하게 받아들여지는 미의 기준이 뭔지를 비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녀 모두 일단 하얀 것을 선호하고 여리여리 혹은 호리호리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여자: 여리여리하고 얼굴 하얗고 청순한 스타일. 예를 들면 김태희, 한가인, 전지현 같은 여자 연예인을 대개 한국에서 가장 예쁜 여자 연예인으로 꼽힌다. 여자 아이돌의 스타일링을 봐도 태닝이 됐다거나 근육이 뿜뿜한 경우는 드물고, 대체로 하얗고 마른 스타일이 많다. 물론 건강미 뿜뿜한 여자 연예인도 많고 그걸 예쁘게 보는 사람도 많다! 다만, 보편성을 따지면 하얗고 여리여리한 사람을 선호하는 것 같고, 건강미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보통이다.
남자: 최근 짐승남과 짐승돌이 부상하긴 해서 경계가 모호해지긴 했지만, 대체로 얼굴이 하얗고 호리호리한 스타일. 근육이 있더라도 너무 큰 근육보다는 잔근육이 있는 스타일. 그리고 털은 없어야 하고. 예를 들면 김선호, 송중기, 강동원, 방탄소년단 등 K-pop 아이돌이 공통적으로 하얗고 호리호리하다. 이 밑의 글은 BBC에 나온 기사인데, 한국의 남자 미의 기준이 8-90년대에는 터프가이였던 반면, 요즘에는 "예쁜" 남자가 미의 기준이 됐다고 썼다.
BBC 기사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서양애들은 하얗고 호리호리한 한국 남자 연예인들을 보고 "여성스럽다 (feminine)"하다고 인식하는데, 그게 틀렸다는 논조가 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남자들의 꾸밈과 가꿈은 잘생김 (good looking)을 위한 거지 그게 꼭 여성스럽다는 건 아니라고. 나는 이 단락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데, 한국 남자 연예인 사진을 보자마자 게이 아니야? 이런 반응을 보이고,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왜 인기가 있냐는 질문을 하는 무지한 서양애들이 진짜로 많기 때문이다. 그런 서양인들에게 일종의 일침을 놓으니까 좀 사이다.
얼루어에서도 비슷한 논조의 기사가 있다. 남자가 화장을 한다고 해서 그게 꼭 여성스러운 게 아니고, 그냥 잘생겨지기는 거라고.
위에 말한 한국의 미의 기준도 미국에서 당연히 찾아볼 수 있는 미의 기준 중 하나다. 예를 들면 스칼렛 요한슨, 앤 해서웨이, 조셉 고든 래빗, 티모시 샬라메 등등 우리나라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연예인들이 미국에도 꽤 많다. 또 공통적인 미의 기준은 이목구미 뚜렷하고 머릿결 좋은 것?
위의 경우를 제외하고, 미국에서 좀 더 광범위(?)한 미의 기준은 좀 다르다. 미국에서는 여자나 남자가 피부가 태닝 되어 있고 근육이 있는 탄탄한 몸매를 가진 것이 미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좀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핫"해 보이면 예쁘다, 멋있다고 한다. 핫해 보이는 것들 중에는 남자들 털도 포함되더라. 신기... 우리나라는 남자 털을 보고 핫하다고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여자 예를 들면 아드리아나 리마 (미국인은 아니고 브라질 사람이지만), 메간 폭스, 제시카 알바, 카메론 디아즈 등. 남자 예를 들면 헨리 카빌, 크리스 파인 (좀 하얗지만), 데이비드 베컴 (영국인이지만), 톰 하디, 조지 클루니 아미 해머 등.
우선 미국애들은 피부가 흰 것을 창백해 보인다고 여기고, 건강하지 않다고 여긴다. 한 번은 내가 맷 (박사 친구)한테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냐고 했더니 "상처 주네"라는 반응을 보였다. 맷은 정말 공부만 해서 햇빛을 안 쬐므로 백인 중에서도 꽤 하얗다. 하얀 피부를 싫어해서 그런지, 한여름에 해변가에 간다거나 겨울에 스키장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선크림을 바르는 사람이 미국에서는 드물다. 선크림을 바르는 건 피부암에 걸리지 않으려는 생존전략에 가깝다. 그러니까 난 미국 생활 10년 중 선크림을 바름으로써 피부가 하얘지는 것을 원하는 서양인을 본 적이 없다. 2주일에 한 번씩 태닝을 다니는 친구도 있고, 내 가무잡잡한 피부를 부러워하는 친구도 많았다. 나는 주근깨도 많은데 그 주근깨가 너무 귀엽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처음엔 저엉말 생경했다.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피부가 어둡고 주근깨가 있다는 건 그만큼 햇빛을 많이 받았다는 말이니까, 창백한 하얀 얼굴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태닝 크림, 태닝 베드가 있는 살롱 광고 등은 보기가 힘들지만 화이트닝 제품은 그 어떤 화장품 라인에도 있을 정도로 흔하다. 한국에서 여름에는 양산을 쓰고 다니고 선크림은 비가 오는 날에도 바르는 건 꽤 흔하다 (물론 양산을 쓰고 선크림을 바르는 목적 중에 피부암을 예방하기 위함이 크겠지만, 얼굴이 타지 않기 위해 바르는 사람이 한국에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얘기). 그리고 주근깨는 없는 것이 더 예쁘다.
나는 워낙 피부가 잘 타서 어릴 때부터 아프리카 살다왔냐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물론 안 그러겠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반 친구들이 OOO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라고 자주 놀렸다. 내가 어느 정도로 잘 타냐면, 박사 때 하루 날씨가 좋길래 강가 따라서 5km 조깅을 하고 학교에 갔다. 교수님이 날 보자마자 해변가에 휴양 갔다 왔냐고 물어봤다. 고작 30분 조깅했을 뿐인데 그만큼 어둡게 탈 정도다. 암튼 워낙 피부가 어두운 나는 미국에서 튀지 않는다.
운동하는 이유도 많이 다르다. 물론 건강을 목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도 한국에 많지만, 그래도 운동 = 다이어트라는 인식이 강하다. 한국에서는 운동은 살을 뺀 여리여리하고 호리호리한 모습을 만들기 위함이 크다. 적어도 여자 입장에서는. 지금은 보통 체격이지만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의 나는 엄청 말랐었다. 말랐으니까 난 딱히 운동할 필요가 없지, 운동 안 해도 되지라는 생각이 나에게 내재돼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운동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뭐 끽해야 초딩때 아빠랑 등산 다닌 거, 대학원 사람들하고 1주일에 한 번 배드민턴 친 수준? 암튼 최근에 김민경의 운동뚱을 보면서 운동은 다이어트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다.
미국은 핫해 보이려고 운동한다. 미국에서는 근육이 뿜뿜한 몸매를 매력적으로 여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큰 근육이더라도. 물론 다이어트 목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비만인 분들), 보통 체격이더라도 근육량을 키우고 탄탄한 몸매를 섹시하다고 느낀다. 나는 박사 1학년 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고 너무 삶이 괴로워서 시작했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이혼하게 생겼으니 공부를 하려고 해도 도저히 집중이 안됐다. 근데 운동을 하는 그 순간에는 일단 몸이 너무 힘드니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잊게 된다. 그게 내게 너무나 필요해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운동에 습관이 들려 10년째 운동을 하게 됐다.
처음엔 미국 애들의 미의 기준이 낯설었다. 머리로는 "아 이런 게 미의 기준이구먼" 싶지만, 막상 내 눈에는 여전히 여리여리하고 얼굴 하얀 여자가 예뻐 보이고, 강동원 같은 남자가 더 멋있어 보였다. 사실 당연한 건데. 난 한국에서 20년 훨 넘게 자라왔고, 한국 사회가 가진 (한국 문화가 나에게 주입한) 미의 기준에 길들여져 있었으니깐, 어디 내 관점이 쉽게 변하겠나. 어렸을 때부터 티비에서 본 예쁜/잘생긴 연예인들, 학교 다니면서 인기 많은 여자/남자애들, 대학/직장에서 선호하는 외모 등등을 늘 보고 자랐으니깐, 한국 내에서 살면서 한국 사회가 가진 (내게 주입된)한 미의 기준과는 다른 미의 기준을 갖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어쨌든, 미국의 미의 기준에 적응될 때 까지는 2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내가 내 미의 기준을 넓히려고 딱히 노력한 건 아니고, 그냥 어느 순간부터 "오잉 쟤 이쁘다. 오잉 쟤 멋있다"라는 생각이 드는 애들 중에 몸짱이 많다는 걸 느꼈다.
왜 한국과 미국은 미의 기준이 이렇게 다르게 발달했을까 궁금했는데, 석사 때 어쩌다 알게 된 친구가 흥미로운 논문을 읽었다며 소개해줬다. 그 친구도 논문 제목이나 저자를 기억을 못 해서 내가 한참 구글링을 해봤는데, 구글에도 안 나오더라.
암튼 그 친구가 말한 논문/아티클에 따르면, 의료보험이 발달된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건강미를 "미"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의료보험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나라에서는 건강미를 매우 중요한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 물론 인과관계는 아니고 상관관계겠지만.
듣고 보니 꽤 그럴싸한 설명이다. 미국은 고급 의료보험은 정말 잘 되어 있는데, 평균적으로 치면 우리나라보다는 당연히 의료보험 서비스의 질이나 가격 면에서 뒤처진다. 보험서비스가 안 좋으면 의료서비스에 돈도 많이 들어가고, 돈이 없으면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서 장애를 가지게 된다거나 죽을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을 수 있다. 따라서 의료보험이 별로인 나라에서는 신체 건강하고 안 아파 보이는 (얼굴이 하얗지 않고 적당히 태닝이 되어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호하게 될 확률이 높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게 미국 사회의 미의 기준에 반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한국처럼 의료보험 서비스가 좋은 나라에서는 좀 아파도 돈 때문에 병이 커진다거나 죽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고, 따라서 배우자 선택과정에서 건강미가 낮은 우선권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게 우리나라 미의 기준에 반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 (구글에서도 나오지 않는) 연구 결과는 허점이 많지만 그래도 적어도 고개가 끄덕일 정도의 설명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