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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라KAYLA Sep 12. 2023

케티아핀 300mg, 프라제팜 15mg를 먹으며

내가 느끼는 변화들을 적어보다가 과거이야기까지 다 해버린 썰

어느새 약처방을 받고 복용하고 있는지 3주나 흘렀다.

보통 효과는 한 달, 빠르면 3주 차에 나타난다는데 내가 느끼는 것들을 좀 적어두고자 한다.


* 나의 정신과 의사에 따르면.... 케티아핀은 범정신병에 쓰는 약물이라고 설명해 주었고 내가 PTSD를 겪고 있고 플래쉬백현상도 꽤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처방해 주었고, 프라제팜은 안정제의 일종으로 수면제의 역할로 처방해 주었다. (우울증에는 종류가 많고 그에 따른 약 종류도 많은 듯하다)


지난번 닥터와의 만남 이후로 나에게 일어난 눈에 띈 변화가 있다.

"내가 꽤 가치가 있는 사람이구나"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껏, 내가 집에만 있다는 이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밥을 차리고 집을 치우는 일을 했는데(그 안에서 느낀 보람이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다.) 그것이라 함은, 나에게 있어서,

<신랑이 벌어오는 돈으로 장을 보고 음식을 하고 살림을 한다>는 의미였다.

내 배우자가 금전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나는 그것을 최대한 절약하며,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것. 이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 내가 한 노력(생각 및 행동)은,


그냥 당연히 해야지, 엄마니까 해야지, 나는 돈을 안 버니까 이거라도 해야지, 보탬이 돼야지.

더 움직여야지. 밖에서 돈 버는 사람이 있는데 나도 집에서 그만큼 움직여야지.


졸려서 자고 싶은데도 아이가 있으니 뒤로 미루고(사실 미룰 수밖에 없고), 

내가 배가 고파도 일단 애부터 먹여놓고 잠시 노는 시간에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마련이었고,

냉장고 속 식자재들을 보며 요리조리 어떻게 더 알뜰하게 요리하여 먹을 수 있을까 매일, 매 식사 때마다 고민하는 것이었다.

커피 한 잔을 '오롯이' 마시고 싶은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 아이에게 TV를 보여주곤 했는데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나 좋자고 아이에게 영상물을 틀어주다니... 내가 쉬자고 아이를 이렇게 '방치' 하는 건가 고민하고 반성하고 죄스런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집에서 가정보육하는 게 일인데, 나 좋자고 TV나 보여주는 엄마.' 그런 엄마라니... 남들은 미술놀이도 하고 촉감놀이도 하고 여러 가지 놀이들도 열심히 준비해서 양껏 놀아주던데 나는 어쩌다 한번 큰 마음먹고 도전하는 놀이들이라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부정적인 틀>에 낙인찍으며 버텨온 하루하루였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일 년 이년 벌써 삼 년이 넘었더라.


나는 나를 이렇게 밀어붙이는데, 배우자는 본인 쉬는 시간을 악착같이 챙기는 것을 지켜보며 순간순간 화가 치솟았다. 그렇게 서로를 향해 화만 내고 비난만 하던 어느 날,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를 뭐라고 하던 아빠, 내 기억에 엄마는 열심히 한 것 밖에 없는데 트집 잡고 뭐라고 하던 아빠,

자기 말이 먹히지 않고, 자기 뜻대로 상대가 움직여지지 않자 노여워하며 TV를 때려 부수고 물건을 던지던 아빠. 방바닥에 떨어진 유리파편을 고무장갑 낀 손으로 주워 담으며 엉엉 울지도 못하고 울음을 참으며 드문드문 꺼이꺼이 소리 내던 엄마. 그리고는 그 조각들을 버리러 밖으로 나간 엄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던 어린 나.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더 어린 내 동생.


친척들을 만나면 오가는 술에 늘 좋은 인상만을 남기던 아빠가 수틀리면 얼마나 무섭고 매섭게 때리는지 다들 보았으면서도 방치하고 애써 눈을 피하던 어른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서 살이 찢어졌는데 밤에 몰래 방에 들어와 후시딘을 발라주던 외할머니.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아무 말도, 아무 제지도 하지 않던 엄마.


학교에서 상을 받아도 입이 찢어져라 환희 웃으며 날 품에 꼭 안아주지 않던 엄마와 아빠.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걸로 교만하면 안 된다고 방에나 들어가라고 하던 말들.

내 딴에는 시험공부를 안 하고 치운 과목에서 68점인가 받았는데 그 딴것도 자랑이라고 하냐며 교과서 모서리로 머리를 내리 찧던 아빠. 그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베란다로 내쫓고 무릎꿇히고 손들라고 해놓고 MBC느낌표를 보며 웃던 아빠. 그리고 그런 나를 쳐다도 보지 않던 엄마.


집에 와서 밥통을 열고 혼자 냉장고 속 반찬을 꺼내서 먹던 날,

어느 날은 그 반찬들마저 상해서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담으면서 배고픈데 먹을 게 없어서 짜증이 났던 마음.

그런 짜증을 삼키며 슬리퍼를 신고 나가 동네 슈퍼에서 메추리알을 사서 장조림을 하고 버섯이랑 양파를 사서 스스로 반찬을 해서 먹던 날. 이런 걸 해내는 나 자신이 뿌듯하면서도 이 뿌듯함을 칭찬받고 싶었던 내 마음.

소풍날, 일찍 일어나서 내가 먹을 김밥을 스스로 싸면서 엄마가 해줬다고 자랑했던 날

라면을 끓여서 먹으려다 냉장고 속 계란이 눈에 띄길래 탁, 깨어 넣었는데.. 글쎄 계란이 곯아서 한입도 먹지 못한 채 냄비채로 들고나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던지며 삼켰던 화와 짜증. 그리고 정의되지 못한 슬픈 감정들.

집 앞 길 건너 슈퍼에서 엄마 이름을 대며 라면이랑 과자 몇 개를 골라 담아 집에 가져와서 먹었던 것.

동생이랑 쮸쮸바를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했지만 그만큼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통제범위) 불같이 화를 내고 동생을 때리던 나와 때리고 아파하는 동생을 보며 들던 무한한 죄책감과 미안함.

우리 둘만 남은 집에서 카세트테이프에 의지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녹음하며 놀던 기억.


내가 어릴 적 엄마는 많은 직업이 있었다.

동네 가까운 고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했었고

새로 생긴 대형 마트에서 냉동새우볶음밥을 팔기도 했고 

빨간펜에 들어가서 책 전집을 팔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보험회사에 들어갔고 

엄마랑 같이 주말에 시간 나면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대출 전단지를 붙이던 일

그리고 고객들 줄 거라며 마티즈 뒷자리에 케이크를 한가득 싣고 배달을 다녔지만 

정작 우리가 먹을 케이크는 없었던 것. 

피자헛 피자가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며 보기만 했던 날들

아마 피자헛 짝퉁이었던 빨간 피자였나? 그런 걸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같은 시대, 아빠는 또 아빠 나름대로 일이 있었다.

전기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더 이상 전력공사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집에 누워서 요양을 하다가 주유소에 기름을 나르는 기름탱크로리 일을 시작하게 됐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탱크로리를 직접 사서 정유소로 가야 했고 

정유소에 부탁을 잘해서 일을 받으면 전국 방방곡곡으로 기름 배달을 나갔는데 기름값을 회수하는 것도 아빠의 일이었다. 언제 주겠다 했지만 못 받는 날이 있었고 그 와중에 또 탱크로리를 팔고 사는 과정에서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아마도 가장으로서 자존심이며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겠지. 

그러니 그 화는 자연스레 집에서 약한 존재인 엄마, 그리고 더 나약한 우리에게 돌아왔다.


하교 후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그 적막감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이내 울리는 전화소리에 잔뜩 긴장한 나와 동생이 생각난다. 

"아빠 지금 차대고 집으로 가는 중인데, 청소기 돌려라. 제대로 안 돌려서 머리카락 나오면 한 개당 한 대씩 맞는다" 

그 전화를 끊고 가슴이 떨리기도 전에 부리나케 청소기 코드를 꽂았다. 그리고는 열심히 누런 장판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다.

여자 셋에 남자가 한 명인 집인데 지금 나온 다이슨 v11을 써도 머리카락 하나 정도는 당연히 남을 일인데... 그런 날은 그냥 맞았다. 나중에는 전화를 받고 청소를 하면서도 '오늘은 맞는 날이구나' 생각하며 돌렸다.


그리고 그런 내 옆에서 덩달아 맞을 순서를 기다리는 내 동생이 생각난다. 그 아이는 더 무서웠겠지.

나랑 두 살 터울이 나는데 내 기억에 8살 적 일이니까 그 아이는 유치원 생이었겠네. 많이 컸다고 쳐도 내가 열 살, 동생은 8살.


아이들을 키워보니 순간순간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을 참고, 말로 풀어내며 최대한 감정을 빼고 정제된 톤으로 지시를 하고 훈육을 하고 또 사랑을 표현해 주고 안심을 시켜주고.

생각해 보니 나는 누군가로부터 안정감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치는 느티나무를 부둥켜안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을까(이게 지금 신랑이 나에게 반한 포인트라는 것이... 좀 웃기지만 참 True),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한창 유행을 하던 것도 한몫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외에도 여러 번 맞았고, 경찰에 아빠를 신고도 한 적이 있었다. 죽인다고 칼을 들어서 너무 무서워서 방으로 도망치고 문을 잠근 뒤 휴대전화로 112를 누르던 나와 경찰이 올 때까지의 그 십몇분을 그저 방 안에서 미친듯한 두려움으로 기다리고 있던 나. 아마도 17살 때였던 것 같다.


부모가 자식을 죽인다니, 내가 죽임을 당할 정도로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는 아직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나는 생과 사를 고민했었다.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살까?"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종교적인 질문보다도 실존적인 질문으로 접근했다.

이렇게 나를 때리려고 낳았을까? 나에게 욕을 하며 화풀이를 하려고 그랬을까?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때리다가도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전화를 받던 그 거짓된 상냥한 목소리의 톤이 아직도 생각나고, 멋쩍은 너털웃음이 귀에 들리고 그 장면이 나는 아직도 떠오른다.


어릴 때의 이 무수한 장면들과 수치심, 분노감, 처절함, 슬픔, 비참함 모든 감정들이 각 장면들에 남아서 순간순간 떠오르는데 이걸 Flash back이라고 의사는 명명하였다.


나는 누구나 다 이런 기억쯤은 가지고 있고,

누구나 다 문득문득 이런 게 생각이 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고, 세상으로 나왔고, 세상으로 나오는 중에 또 엄청난 PTSD를 겪었으며

유아-청소년기의 PTSD를 안고 이 사회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내가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내 신랑이 아빠를 닮은 모습을 보이던 날, 나는 무너졌다.


내가 '너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너만은 나를 막대하지 않을 거야, 너만은 괜찮은 사람일 거야, 왜냐면 너는 착하니까'라고 프레임을 씌우고 한 결혼에서 내가 나의 아빠를 보았다. 내 안의 엄마를 볼 때도 종종 있었지만 이 부분은 애써서 컨트롤할 수 있었다만...


나는 그렇게 무너졌고 아이 둘과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은 호텔로 잠시 피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완전한 도피처란 없다.

특히나 외국으로 시집와서 사는 이상, 여기에 내 친정은 없기에 더 그랬고 사실 친정이 있다한들 나에게 뭐 얼마나 큰 힘이 되려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죽고 싶은 나를 살게 하는 건 아이들이었다,

도저히 이 아이들의 얼굴에 <엄마의 자살>로 그림자를 지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들이기도 하지만 내가 죽고 싶은 이유도 이 아이들이기도 했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고 그냥 끝내고 싶은 마음 하나였다.

배우자와의 작은 말다툼에서도 그냥 나를 제발 죽여주면 안 되냐고 애원하듯 말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병원에 갔고, 의사를 만났고, 상담가를 만났다.

그들이 말하길,

내 우울증은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건 길게 시간을 갖고 우리가 계속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울증은 치료될 수 있는 '병'이라고 힘을 주었다.


그래 그게 병이라면... 한번 싸워보자.

그래서 약을 먹었고 먹은 지 3주 차다.


그전에 차 안에 쓰레기가 많다고 싸웠는데 이제는

차 내부 사진을 찍어 배우자에게 보내며

"나보고 치우라는 이유로 이렇게 둔 거니?"라고 물어보는 '기회'를 잡기도 하고

내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직접 치우는 '행동'도 하였고

말다툼에 있어서도 비교적 눈물을 덜 흘리며 내가 생각한, 하고픈 말들을 정돈된 단어들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프라제팜 1알만 먹었을 때는 그저 그랬는데

아침에 반알, 점심에 반알, 저녁에 한 알을 먹으니 뭔가 훨씬 여유가 생긴 느낌이랄까?

유튜브도 작업해 보고, 영상도 찍어보고 이렇게 글로도 남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근데 프라제팜이 중독될 수 있어서 효과를 보았다면 이제 점진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는

케티아핀 300mg + 프라제팜 15mg(아침에 1/2개, 밤에 1개) 이렇게 먹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을 적을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을 잠시잠깐 시간을 내어 여기에 적는 것만으로도 뭔가 시원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내일모레는 파리에 간다.

아이들, 신랑 없이 혼자 파리에 간다.

가서 이것저것 업무도 보고 그동안 보고 싶었던 전시도 보러 가고, 스타벅스도 가고 먹고 싶던 것도 먹고

내 동생도 만나고. 재밌는 시간 보내다 와야지....

사실은 동생하고 헤어질 생각에 슬픈 마음이 더 먼저 드는데 그래도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약 복용 후기인데 어쩌다 보니 이것저것 짬뽕이다.

에라이! 인생이 그런 것 아니겠나?


여기까지 다 읽어주신 그대, 당신이란 존재,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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