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절 가끔 회사 동료들과 야구를 보고 온다길래 참 건전한 취미구나, 하지만 같이 즐길 순 없겠구나 생각했다. 남편도 처음엔 딱히 권하지 않았다. 데이트할 땐 한 번도 야구 얘기를 하지 않았고, 평일 저녁이든 주말이든 함께 있을 때 TV로든 폰으로든 야구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 3년쯤 연애했을 때, 남편이 한 번 잠실야구장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앞선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야구는 전혀 모르지만 뭐든 같이 시간을 보내면 재밌을 거 같았다. 한데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싫진 않았다. 그래서 몇 번 더 같이 다녔고, 그러다 점점 스며들었다. 구체적으론 장타나 홈런보다 호수비 장면이 멋있어서 '오, 야구 꽤 짜릿한데...!'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내 혼자서도 챙겨보게 되더니, 어느새 매일 경기를 보고 틈만 나면 직관을 가는, 심지어 혼자서도 다니는 지경이 돼버렸다. 남편도 내가 이 정도로 빠질 줄은 몰랐다고 신기해한다. (과몰입해 스트레스받고 있던 어느 날엔 야구 보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웃기다.)
남편과 취미가 같아지니 야구는 우리 부부의 일상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같이 야구를 보고, 기사를 읽고, 유튜브에서 새로운 영상이 나오면 바로바로 공유하고, 자기 전엔 야구 얘기를 한참 한다. 다음날 등판하는 선발 투수의 컨디션을 걱정하고 있다. (내 출근이나 걱정해야 할 텐데.) 데이트는 늘 당연하게도 야구장이다. 옷이나 가방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는 빠더너스에서 나온 LG트윈스 콜라보 바람막이는 사고 싶다고 말했다.(실패했다. 내 거만 성공함. 미안하다.)
먼 미래에 만날까 말까 한 얼굴도 모르는 우리의 아이는 이미 '엘린이'가 돼 있는데, 남편은 "인생의 쓴 맛을 알아야 한다"라며 어릴 때부터 야구를 같이 보러 다니겠다고 한다. 조카에게도 시도해 봤지만 당일 야구장 도착 직후 우천취소가 되며 날씨의 쓴맛만 보여줬다.
2024년 추억의 8할은 야구장이다
이쯤 되니 가끔 우리 부부 삶에 야구가 없었다면 어떤 일상을 보냈을까 생각하게 된다. 특히 나는 야구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었던 만큼 남편의 잠실야구장 데이트 제안은 내 삶의 빅이벤트가 돼버린 셈이다. 남편 따라 LG팬이 됐으니 남편이 다른 팀 팬이었다면 나 또한 그랬을 것. 파란색으로 맞춰 입고 엘도라도를 불렀을 수도 있고,망곰 유니폼 입고 잠실에서 '승리를위하여' 부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두 응원가 다 너무 좋다.)
야구팀은 운명처럼 만난다는데 난 그게 LG였다. 앞으로 수십 년은 더 볼 테고 흥망성쇠를 목도할 텐데 이쯤 되면 남편은 내 삶에 엄청난 파도를 일으킨 사람이다. 이것뿐일까. 먼 훗날 미래에 만날 그 아이는 갸린이, 한린이, 큠린이 뭐 다른 어린이가 될 기회를 태어나기 전부터 잃어버린 채 LG에 발목 잡힐 운명이 돼버렸다.
이 모든 게 신기하고 웃기다. 남편아,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 앞으로도 우리 집엔 유니폼과 티켓이 쌓여갈 것이야. 내년에도 신나게 다녀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