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주말에 뭘 했냐면요
사람을 많이 만나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부서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하는 시민인터뷰만 해도 그렇다. 거리에 나가 불특정 다수에게 다가가 말 거는 것에서 시작된다. 빠르게 자기소개와 취재 취지를 설명하고 그들의 귀한 시간을 허락받아야 한다. 제보자들도 모두 초면이고, 취재 과정에서 접촉하는 여러 관계자 모두 낯선 사람들이다. 전문가 인터뷰도 마찬가지. 각 분야의 학자들은 대부분 처음 뵙고, 빠르게 날짜와 시간을 정해 만나 인사하고 촬영한다. 이후로 두 번 세 번 더 뵙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중간중간 '약속된 만남'도 빠질 수 없다. 취재원 미팅이 그렇다.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다. 같이 점심을 먹고, 저녁을 함께하고, 커피를 마시며 관계를 쌓는다. 당장 어떤 구체적인 목적이 있어 만나는 건 아니지만, 서로 얼굴을 트고 연락을 이어가야 부처 현안이나 업계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내겐 후자가 훨씬 어렵다. 낯선 이에게 말 거는 건 (그리고 거절당하는 건) 이제 익숙해졌는데, 일적으로 만나 뭔갈 같이 먹으며 최소 1시간 마주하는 건 7년째 참 쉽지 않다.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봤을 때 사회성은 노력으로 잘 갖춘 듯한데, 기본적으로 사교성이 떨어진다. 친해지는 데 워낙 오래 걸린다. 일하다 만난 분들이 가끔 내게 "E이시죠?"라고 물을 땐 속으로 쾌재를 외친다. 애쓰며 사는 I 90% 인간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24시간 지낼 수 있는 성격이지만, 미팅에선 일부러 더 말을 많이 하려 한다. 중간중간 비는 공백이 싫어 만나기 전부터 여러 주제를 생각한다. 상대방이 속한 조직에 관한 얘깃거리를 우선 생각하지만, 그런 대화만 하면 체할 수 있으니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소재를 여러 가지 머릿속에 갖고 가야 한다.
며칠 전 한 출입처 취재원 두 분과의 점심 미팅에선 '흑백요리사' 덕분에 수월하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상대도 다 봤고, 나도 다 봐서 다행이었다. 이런저런 가벼운 얘기들을 하다 보면 분위기가 풀어진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나는 솔로, 흑백요리사 같은 대히트 작품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주제는 주말에 뭐 했냐는 질문으로 넘어갔다. 뭘 했나 잠시 생각해 보니 어김없이 또 야구장에 있었다. 3월도, 4월도, 5월도, 한여름도, 그리고 9월, 10월도 주말엔 야구본 기억밖에 없어 다른 얘깃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작년만 해도 이 정도로 직관을 많이 가진 않았기에 주말엔 이런 영화를 봤다, 뭘 샀다, 어디 나들이를 다녀왔다는 에피소드를 돌려가며 풀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야구를 보고 왔다고 짧게 답했다. 굳이 자세히 말하진 않으려 했다. 야알못 시절 이런 미팅에서 야구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하나 난감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리액션은 하고 싶은데 아는 게 없으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더랬다. 하지만 이내 들켜 "ㅇㅇ씨는 야구 안 보시나 보다"란 말을 듣곤 "네, 조만간 한 번 봐야겠어요~"라는 어색한 대답으로 서둘러 마무리하는 패턴이었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야구를 전혀 안 보는 사람도 정말 많다는 걸 그래서 알고 있다. 또 야구는 애초에 관심이 없으면 기본적인 규칙도 팀도 아무것도 모를 수 있기 때문에(=불과 2년 전의 나다) 먼저 대화 주제로는 잘 안 꺼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마침 상대방 모두 야구팬이었고, 그 길로 쭉 야구 대화를 했다. 한 분은 한화 팬이었는데, 올해 야친자로 살며 마침 대전 구장도 가봤고 한화 선수들도 웬만하면 다 알고 있기에 신나게 한화 얘기에 동참했다. 재밌었다. 드라마 얘기할 때보다 훨씬.
무엇보다 일상의 도피처 같은 취미의 영역인 야구를 일적인 자리에서 먼저 꺼낸 건 처음이라 새로웠다. 이것도 야구를 보며 달라진 점이다. 미팅은 다음 주도, 그다음도, 앞으로도 계속된다. 누구를 만나든 당분간은 한강 작가 얘기가 빠지지 않을 테고, 쌀쌀해지는 날씨도 단골 소재겠다. 또 어디선가 야구팬 만나면 신나게 떠들어야지.
그나저나 남은 올해 한 번이라도 더 주말에 야구를 볼 수 있을까. 금요일인 오늘 저녁 열리는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결정된다. 예약출고한 이 글이 나왔을 땐 이미 결과가 정해졌겠다. 어떻게 됐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