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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Mar 12. 2021

영석이에게 - 열일곱 살 우린, 무슨 꿈을 꾸었더라?

미친 듯이방황하면, 그게 또 멋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2018년 미국 보스턴 공공 도서관에서 찰칵

독서실을 같이 끊는 게 아니었어. 부모님들이야 우등생이었으니 믿으셨겠지. 너 때문이었을까? 나 때문이었을까? 독서실에서 엎어져 자다가 자다가 놀이터에서 그네 좀 타다가, 삼양 시장에서 만두나 사 먹는 게 일탈의 전부였지. 담배도 좀 피우고, 화끈하게 깡소주라도 마셨더라면 라테는 말이야. 뻐기기라도 했을 텐데. 우린 늘 불안했고, 늘 놀았어. 느림보 이구아나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타락했지. 기억나니? 중간고사 때 무슨 과목 시험인지도 모르고 가서 다 찍었던 거? 그런 애들이 아니었잖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였지. 그때 이후로 악몽을 자주 꿔. 나만 빼고 모두 다 열심히 문제를 풀어. 나는 답을 모르니 멍해져서 끝장난 인생을 저주하다가 깨. 지금도 그런 꿈을 꾼다는 게 믿어져? 다른 애들은 성문 영어 기초를 고, 종합을 본다더라. 실력 정석을 본다더라.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고1인 주제에 하고 있었지. 손을 놨어. 중학교 땐 그렇게도 쉽던 수학이, 왜 그렇게 어려워진 걸까? 집합이나, 행렬처럼 쉬운 것조차 주저리주저리 무슨 설명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정이 떨어지더라. 정석 수학만 펼치면, 머리가 아파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


성적이라도 유지됐다면 우린 절교까지는 안 했을 거야. 네가 공부란 걸 해야겠다며 도서실 안 나온다고 했을 때 버려진 느낌이었어. 서울대 연고대는 무조건 보내주는 족집게 과외선생님에게 특훈을 받는다면서? 너는 멍청한 거니? 순진한 거니? 같이 과외를 받자고? 구멍가게 하는 우리집이랑, 건물주인 너네 집이랑 같아? 난 처음 봤어. 그렇게 큰 방을 혼자 쓰는 애를. 우린 온 가족이 자고도 남는 그런 방을 혼자 쓰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지. 방 끝에서 끝까지 몇 번을 굴러도 닿지 않는 방이라서 실제로 굴러도 봤잖아. 태어나서 자몽이란 것도 처음 먹었어. 어머님이 속껍질도 까먹는 거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면, 쓰디쓴 껍질을 우걱우걱 씹을 뻔했지. 아들 친구가 왔다고, 쌈무에 돌돌 말아서 먹는 소고기를 주셨는데 그런 걸 먹어 봤어야지. 우리 어머니랑 동갑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더라. 이렇게 젊고, 아가씨 같은 사람도 엄마일 수 있구나. 너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어. 하지만 그 세상이 전부는 아니란다. 내가 존재하는 세상도 분명한 세상이야. 같이 과외를 받자니? 그건 나에 대한 모독이야.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았지.


고 3 때 또다시 같은 반이 됐을 때, 나는 학교 그만 다니고 싶었어. 이게 뭐냐고? 대입만 생각해야 하는데, 네가 왜 우리 반인 거냐고? 나는 이를 악물로 너를 쌩깠지. 너도 어리둥절한 척하면서, 나를 외면했잖아. 그렇게 죽고 못 살았으면서 어쩌면 1년 내내 말 한 번을 안 섞을 수가 있었을까? 우리는 끝까지 가자. 영양가 없는 맹세는 사실 내가 주로 했었지. 입바른 소리도 먼저, 배신도 먼저. 물론 나는 네가 배신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재수를 하고, 너무 죽겠어서 너에게 연락했지. 130명이나 되는 학원 교실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게다가 한 여름이어서 너에게 전화를 했어. 술 좀 사달라고. 대학생인 네가 술 좀 먹여달라고. 차갑게 외면하던 내가 어린애가 돼서 징징댔지. 그때 생각하면 또 열 받네.


-그렇게까지 심각했었어? 난 그 정도인 줄을 몰랐지. 고3이라 정신도 없었고.


개새끼.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사실 더, 더 완벽하게 너를 쌩깠던 거야. 어떻게든 너에게 닿기를. 내 외로움과 괴로움이 닿기를.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지. 나나 심각했을 뿐, 나나 해석이라는 가짢은 지옥에서 발버둥 쳤을 뿐이었지. 그때 그 감정은 누가 뭐래도 사랑이었어. 너의 존재와 행동이 모두 나에겐 절대적이었으니까. 결국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되고, 꼭 붙어서 교양 수업을 들으며 우린 예전의 관계로 돌아갔지. 둘 다 그렇게도 가기 싫다던 고대라서 더 웃겼어. 왜 갑자기 옛날이야기냐고? 몇 년에 한 번 카톡이나 주고받는데도,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까? 사춘기의 열병은 유통기간이 있더라. 내가 네 결혼식 사회를  보고, 명절이면 내가 너네 집으로 인사를 가고. 보기 드물게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예전의 우리는 이제 흔적조차 없지.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게 문뜩 신비로워서. 그렇게 집착하고, 미워했던 내 감정이 참 유치하고 쓸쓸해서, 그때의 나를 안아주고 싶어지네.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약하고, 아픈 아이였을까? 우리는 조금 더 늙으면 또 그 놀이터에 또 가야 해.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없는 자유인이 된 마당에, 어슬렁대면서 막걸릿집이라도 찾아내야지. 옛날이야기로 밤을 새울 수 있는 친구야. 잘 지내렴. 곱게 늙자꾸나. 우리의 생이 조금씩 닳아갈수록, 해야 할 이야기는 더욱더 많아질 테니까. 그때의 여름 냄새를 또 맡을 수 있을까? 늙은 나의 후각이 갑자기 궁금해지는 밤이야.


PS 매일 글을 씁니다. 밤은 신비로워요. 나는 밤의 시공간에 머물면서 시키는 대로 쓰고 있어요. 밤이 시키는 대로 고요해지고 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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