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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Nov 03. 2020

안경을 벗었어요. 흐릿하게 살아요

삶의 작은 힌트를 본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안과 의사도 아니고, 건강 전도사는 더더욱 아니죠.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그게 실험이 됐어요. 눈이 계속 나빠져서, 안경 도수가 안 맞는 거예요. 태국에도 안경점이야 많지만, 믿음이 안 가더라고요. 눈이 많이 안 좋아요. 여덟 살 때부터 안경을 썼으니, 40년을 쓴 거죠. 시력 검사할 때 가장 큰 글자가 보일랑 말랑할 정도예요. 안경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죠. 안경만 쓰면 눈이 너무 아파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일단은 벗고 보자. 도수도 도수지만 생활 흠집도 많아요. 한국이라면 안과 가서 염증 치료도 하고, 안경 렌즈도 바꾸고 반나절이면 해결될 일이죠. 태국이라서 그 반나절 일이, 큰일이 된 거예요.


안경을 벗고 살다가 눈이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지? 그나마 안경발인데, 벗은 몰골은 너무 추하지 않을까? 저에게 안경 없는 삶은, 쌩얼로 출근길에 오르는 여자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팔뜨기다, 사팔뜨기

-졸라 못 생겼어


중학교 체육 시간에 옷을 갈아입으면서 잠시 안경을 벗었더니, 반 친구들이 비명을 지르는 거예요. 저야 몰랐죠. 안경을 벗었을 때 제가 얼마나 이상한지요. 화급하게 안경을 쓰기는 했는데,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더군요. 안경은 내 얼굴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 제2의 피부가 됐어요. 그러니 안경을 벗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대사건이었던 거죠. 유튜브에서 시력 좋아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봤어요. 눈 주위 혈자리를 꾹꾹 눌러주고, 눈동자를 좌우로 끝까지 움직여 보라더군요. 그걸 매일 열심히 따라 했어요. 시력이 좋아지면 물론 좋겠지만, 일단 남들이 볼 때 괴물처럼은 안 보여야 하니까요. 안구 힘을 길러주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요. 안경 없는 삶은 정상적인 삶은 아니죠. 글을 쓸 때, 글자가 보여야 말이죠. 거의 감으로 써요. 쓰고 나서, 스마트폰으로 다시 봐요. 퇴고를 특이하게 하는 거죠. 밤이면 위험하기까지 해요. 잘 안 돌아다녀요. 헤드라이트건 가로등이건 모두 동그랗게 번져서 공작새 날개처럼 커져요. 뿌옇고, 번짐이 심한 세상이라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위태해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배우들 얼굴은 이제 의미도 없어요. 짐작만 하는 외모가 돼요.


그러다 보니 세상을 두리번거리지 않게 돼요. 누가 아무리 예쁘고, 잘 생겨도 제 눈엔 그냥 사람인 거예요. 윤곽이고, 거친 스케치 정도인 거죠. 외모가 큰 의미가 없어졌어요. 큰 사고가 날 정도로 위험한 순간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안경 없이 다니죠. 놀라운 건 눈의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도수도 안 맞는 더러운 렌즈를 안 끼니, 눈에 스트레스가 줄었나 봐요. 게다가, 게다가 시력이 좋아졌어요. 안 보이던 글자들이 보여요. 획기적으로 좋아진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나빠지지는 않았어요.


과테말라 세묵 참페이 계곡에서 급류에 떠밀려 죽을 뻔했던 날이 떠올라요. 통나무에 매달려서는 고래고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댔죠. 통나무에 매달려서 물가로 나올 생각은 한참 뒤에나 들더군요. 나 스스로 나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던 거예요. 급류에 휩쓸려서 죽거나, 누군가가 죽기 전에 도와주거나. 선택지는 딱 두 개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러다 정말 죽겠다. 극한의 공포 뒤에, 나무에 매달려 움직일 생각을 한 거죠. 저에겐 저를 구할 힘이 있었던 거예요. 안경의 도움 없이, 저를 구할 힘도 있지 않을까요?


안과에 가지 않으면, 안경이 없으면 제 눈은 계속 퇴화하는 줄 알았어요. 안경이 없다. 어떻게든 회복되어야 한다. 위기의식은 제 시력에 큰 도움이 됐어요. 그래도 여전히 뿌연 세상 속에 살아요. 그런데 한국에 가더라도, 멀쩡한 시력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부족한 눈으로 보는 세상이 좋아요. 모든 게 선명했을 때, 저는 두리번거리기 바빴아요. 시각의 노예가 되어서, 힐끔댔어요. 모든 게 불분명해지자, 집중력이 말도 못 하게 올라갔어요. 방 안에만 갇혀 있어도 답답하지 않아요. 더 좋은 시력이, 능률적인 삶을 되려 방해했어요. 재밌죠? 더 많은 걸 가진 삶이,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저는 안경 없는 삶에서, 작은, 아니 꽤 큰 힌트를 찾았어요. 소유와 완벽함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졌어요. 제 딴엔 성과여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PS 일부러 눈이 나빠져야겠다. 그렇게 해석하시면 잘못 이해하신 겁니다. 지금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즐기세요. 스스로의 힘으로 개선하세요. 매일 글을 씁니다. 저의 글이 아주 작은 도움이 된다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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