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불로 질러버린 세계여행 @한국
남편과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여행담을 풀어놓느라 목이 쉴 지경이었다. 여하튼 그리운 한식을 먹고 가족들을 만나니 감동으로 목이 메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여행은 언제 그랬냐는듯 나에게서 발자취를 감춰버렸다.
내 삶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
어찌나 그렇게 모든 것이 그대로인지 야속할 지경이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쿨하게 살게 될 줄 알았다. 66 사이즈지만 쫄티를 입고, 백수지만 당당하게 다니고, 생활에서도 여행자처럼 다니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이어트를위해 요가 학원을 등록했고, 다시 사회로 돌아가기 위하여 토익 학원을 끊었으며, 여행 전에 그랬던 것처럼 늘 다니던 길로만 다녔다. 삼십 년 가까이 공고하게 쌓아온 나라는 인간이 반년의 여행 경험으로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건 바뀌었다. 나는 이제 마음껏 방황할 수 있다. 날씨 좋은 날 이어폰을 끼고 걷고 싶은 길로 쭉쭉 걸어 나간다. 어느 방향에 유적지가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된다. 걷다 보면 도착하겠지. 힘들면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 맥주 한잔 마시면 그만이다. 골목 사이사이에 있는 책방, 과일 가게, 빵집도 면밀히 구경한다. 이러다 언제 도착하려고 그러냐며 재촉하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걸어도 유적지가 보이지 않아 다시 지도를 펴고 위치를 확인한다.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걸어왔지만 괜찮다. 그곳은 내일 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 근처에서 가까운 유적지를 보기로 한다. 갑자기 계획을 바꾸면 어떡하냐고 아무도 핀잔을 주지 않는다. 골목 사이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화방을 발견했다. 방황하지않으면 찾을 수 없는 보석 같은 날들이 우리 삶에는 가득하다.
나는 식물을 키우는 족족 죽이는 엄청난 손을 가지고 있다. 모두 나의 게으름을 타박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정해진 시간에 적당한 물을 줬으니까. 반면 엄마는 남들이 죽이고 간 화초마저 살려 놓으셨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키우던 나무들이 지금까지 나이테를 늘려가고 있기도 한다. 푸릇푸릇한 나뭇잎을 보며 비결을 물으니 난감한 표정이시다.
“글쎄, 특별한 방법이 없어……. 그저 자주 들여다봐주는 수밖에.”
엄마 말이 맞다. 자주 들여다보는 수밖에. 시들어 가는 삶도, 여행의 기억도 자주 들여다봐주는 수밖에.
여행이 나의 삶에서 희미해져 가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김밥을 먹으면 엘 칼라파테 모레노 빙하 앞 벤치에서 먹었던 그 맛이 떠오른다. 맥주를 마실 때면 나이를 속이며 즐겼던 뮌헨의 옥토버페스트가 떠오른다. 길을 잃고 헤맬 때면 페스의 구천여 개 골목이 떠오른다. 별을 볼 때면 푼타아레나스의 UFO가 떠오른다. 삼겹살을 보면 할슈타트가 떠오르고, 봄을 품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이과수 폭포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 순간을 환기하면 나는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모든 이에게 여행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여행은 돈과 시간을 소비해야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고, 삼시 세끼 모두 챙겨 먹고, 친구를 만나고, 취미도 즐기는데 자꾸만 내 자신이 시들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제때 물을 주는데도 시들어가는 식물처럼. 그렇게 삶이 무력해지고 생기를 잃어갈 때 혼자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지에서 넘어져도, 길을 잃어도, 계획이 어그러져도, 사치를 부려도 아마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결국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푸르러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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