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가득한 와인 라이프를 위해서
학창 시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오솔길이 있었다. 조금 돌아갔지만 한적해서 10대가 데이트하기엔 딱이었다. 당시 남자 친구는 평소 멀쩡하다가도 그 길만 걸으면 뽀뽀, 뽀뽀 염불을 외는 고장 난 로봇이 된다. 그날은 유독 짜증이 났다.
"아 진짜! 싫다니까!"
살짝 밀친 뒤 뛰어갔는데 그놈이 따라오지 않는다. 내 건강한 근육들이 힘 조절을 못하고 그를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트린 것이다. 하필 어제 비까지 와서 낙엽이 다 젖은 상태. 덕지덕지 젖은 낙엽이 달라붙어 있는 꼴을 보자니 귀여우면서도 측은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눈 감아봐.”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하게 된 첫 뽀뽀. 20년이 지난 지금, 그놈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젖은 낙엽 냄새를 맡으면 첫 뽀뽀 생각이 난다.
후각과 얽힌 경험들은 유독 강렬하게 기억된다. 여기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가 냄새를 맡으면 후각은 정보를 수집해서 곧장 대뇌변연계로 이동한다고 한다. 변연계는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형성하고 처리하는 곳. 이 때문에 변연계를 거치지 않는 다른 감각보다 후각은 기억을 강하게 끌어온다.
그렇다면 후각이 맡을 수 있는 냄새는 몇 가지나 될까? 최소 1만 가지에 이른단다. 와인 전문가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 그중 수 백가지의 향을 분리하고 묘사한다고 하니 일반인은 그 일부도 흉내내기 어려울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 향을 구체화하길 권하는 이유는 향에 얽힌 추억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랄까. 모든 와인의 향을 심플하게 표현한다면 그에 얽힌 기억 역시 밋밋할 것 같다.
와인의 향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SNS에 태그(tag)를 거는 일과 같다.
태그는 정보를 분류하고 검색하기 위해서 탄생했지만 우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공통되는 관심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사용자의 유입을 위해서 태그를 걸기도 한다. 와인 역시 마찬가지. 와인을 표현하는 공통적인 묘사어를 알게 된다면 지금 마시는 와인의 향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타인이 마셔 본 와인의 향을 맡아본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향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가령 와인을 올리면서 #첫뽀뽀향 이라고 올린다면 해석이 분분할 것이다. (경험에 따라 캔디향, 가글의 민트향, 혹은 마늘 향일 지도.......) 그래서 와인 향 태그 걸기의 첫걸음은 전문가들이 보편적으로 묘사한 단어부터 시작하기를 권한다. 세계적인 와인 교육기관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에서는 아래와 같은 표를 와인 시음의 체계적인 접근법으로 삼고 있기에 참고하시라.
WSET Level 2 단계 와인 용어 :
와인 시음의 체계적인 접근법 다운로드 링크
https://www.wsetglobal.com/kr/korean-qualifications/level-2-award-in-wines-kr/
훈련이 된다면 쉽게 지나치던 평범한 날도 감각적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아, 이 서양배와 붉은 사과향. 봄이 오려던 겨울밤에 베프와 신세 한탄하면서 마셨던 와인 향이었지.' 쉽지 않은 작업이라 아직까지는 희망사항이다.
나의 글을 읽은 이들은 이제 내가 '첫 뽀뽀 향이 나는 와인을 마셨어.'라고 말한다면 젖은 낙엽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겠지. '음 부쇼네(와인 보관상태가 올바르지 못할 때 생기는 코르크 결함, 젖은 판지 냄새가 난다.) 와인을 마셨나 보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