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본질에 대하여
매년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한다지만, 2020년처럼 격렬하게 세상이 변한 것을 본 적이 있을까? 또 볼 날이 있을까? 공상과학영화에서 그려오던 꿈의 2020년이 갑자기 절망의 2020년으로 바뀌어버린 많은 이들에게 우선 적잖은 응원을 보내는 바이다.
엉겁결에 사람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더 친숙해졌다. 우리는 재택근무로도 세상이 어느 정도 돌아가는 것을 배웠고, 넷플릭스와 SNS에 정말 많은 콘텐츠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배달 서비스가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며 이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한편, 여행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다는 안타까운 기사도 보았다. 일시적인 현상이면 좋겠지만, 바이러스 사태로부터 야기된 모르는 사람, 모르는 곳에 대한 불신이 여행에 대한 인식을 이전처럼 돌려놓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VR기술 등의 발전이 점점 더 여행을 대체해갈 것 같다. 정말, VR세상 속에서 친구들과 만나 우주정거장에서 무중력 탁구 게임을 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걸어서 대륙을 횡단하던 세상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세상, 이제는 여행하면 비행기가 연상되는 세상, 앞으로는 여행은 집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세상이 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을 계획하는 일, 목적지로 향하는 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등 여행의 모든 과정 속에서 여행자가 겪는 생생한 체험*은 아직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여행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24년 전 처음 가본 유럽여행에서, 엄마 손을 잡고 처음 타본 쿠셋(Couchette)의 흔들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흔들림은 열차 승차감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치고 꽤나 점잖았던 꼬마였지만, 처음 보는 외국인들과 같은 침대 칸을 쓰던 그날 밤은 왠지 모르게 긴장되어 잠도 잘 못 잤다. 요즘도 간혹 어머니와 그때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 우리 둘은 괜히 그 이름 모를 외국인들에게 미안하다며 그날 밤의 분위기를 회상하곤 한다. 물론 그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과연 기술이 발달한다 한들, 나와 어머니의 그날의 체험, 긴장감이 감돌던 기차의 떨림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오늘날은 너무 많은 것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에서 안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행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는 여전히 여행자의 체험이고, 이 가치는 앞으로 충분한 시간 동안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자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와 깊은 소통을 하는 그 행위, 즉 ‘체험’에 집중할 수 있는 여행이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현장감’, ‘감각적 경험’ 이란 단어가 유사하지만, 우리는 ‘체험’이란 단어를 사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