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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Sep 15. 2024

7. 자기 이름은 자기가 알면 되는 거야

   어머님은 귀농 후 농사일이 없는 겨울이면 퇴직 전에 하시던 일을 이어서 보육교사로 어린이집에서 일을 하신다. 서울에서 때때로 집에 올 때면 어머님을 모시러, 그리고 겸사겸사 허드렛일을 거들러 어린이집을 가곤 한다. 요즘 아이들은 아이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라는 것을 이곳에 오면 늘 느낀다. 여기 아이들을 보다 보면 도시 아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아직은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함이 보인다. (아이를 아이 같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과 그들을 둘러싼 각박한 환경이 아닐까?)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이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현자들에게 많이 배울 행운을 얻는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아이들의 대화에 끼지는 못해도 라디오를 듣듯 아이들의 대화를 듣는다. 이 몰래 듣는 라디오가 나는 참 좋다. 가끔 엉뚱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오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질문은 나를 반성하게 한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제 막 글씨 쓰는 나이대, 그러니까 한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이들의 대화였다. 이 나이대쯤 아이들은 글씨를 쓰는 법을 배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쓰는지를 늘 선생님께 와서 묻는다.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이 아이들이 처음으로 쓰는 글자들은 보통 '자신의 이름,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한다. 물론 이 나이대의 글씨는 '쓴다'보다는 글씨를 '그린다'에 가까운 수준인데, 그 글씨가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아름답다.


   그렇게 한창 글씨연습이 끝나고, 종이를 치우는 도중에 내 귀에 들리는 오늘의 사연. 엄마, 아빠까지는 쓰겠는데 우리 엄마, 아빠의 '이름'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대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oo아 너는 너네 엄마 이름 알아?"

"아니, 몰라 너는?"

"나도 몰라."  


   그러는 와중에 점점 더 엄마, 아빠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이 다수가 되는 가운데, 한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다.


"어... 나는 아는데? 너넨 몰라?"


   이 말을 기점으로 4~5명이 되는 아이들의 치열한 설전이 시작된다. 엄마/아빠의 이름을 아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를 가지고 자기들끼리는 세상 진지한 대화가 오간다. 하지만 이내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그렇듯, 일단 논리는 제쳐두고 다수인 '엄마/아빠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이 우세한 가운데 어떤 아이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대단한 것을 깨달았다는 듯, 배를 쑥 내밀며 오늘의 설전을 끝낼 오늘의 명언을 내뱉었다.



"자기 이름은 자기가 알아야지!"   


   조금은 엉뚱한 그 대답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애들 참 귀엽다 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의 대화는 이런 재미가 있다. 여기에 더해 아이들의 대화가 신비로운 이유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이야기를 퇴근길에 곱씹을 때 나온다. 이름... 이름이라... 그것도 나의 이름이라...


   우리가 남의 이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남들을 부르거나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남의 이름을 사용한다. 이름의 쓰임새라는 것이 그렇다. 학창 시절에 마르고 닳도록 봤던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어떻게 보면, 남의 이름은 어떻게 보면 겨우 그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속물적이다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물질적인 부만큼이나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명성, 명예'일 것이다. 여기에 한자 '이름 명(名)'을 쓴다. 또, 흔히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이름 있는 사람'이라 부르고 그 반대의 경우를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런 표현은 다양한 집단이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대접의 질적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이 관용구에서도 역시나 '이름'이라는 것은 꽤나 중요한 단어이다. 남이 우리의 존재에 주목하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우리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고, 약점이 있어도 관대하게 받아주었으면 하는 욕구, 이 모든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우리는 늘 '이름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그 '이름'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타인의 욕망이라는 아주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토대 위에 우리를 세워 놓는다.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는 것, 그것은 나를 갉아먹는다. 내 마음을 좀먹는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누구 못지않은 존재권리를 가진 개인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의 소임을 다 하였고, 인생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 남겨진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기 때문에 불안하고, 질투하고, 갈망한다. 우리가 불안하고 목마른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잊고 사는 시대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은 상상을 한다. sns에 열광하고, 인플루언서가 되고자 하는 이유가 과연 돈뿐일까? 온 세상이 나를 주목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목적이 아닐까? 사람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은 아닐까?


    오늘 만난 이 어린 현자의 말이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은 우리의 그 모든 불안이, 질투가, 갈망이 틀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해줬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를 몰라줘도, 내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져도 내가 내 이름을 아는 한, 나는 여기 오롯이 있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늘 그것을 잊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살짝 겸연쩍어진 나는 오늘도 머리 한쪽을 벅벅 긁으며 이 어린 현자들에게 한 수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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