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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Oct 27. 2024

19.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35년 삶 중 뭐든 한방에 무언가를 이루어본 적이 없다. 남들 눈에 띄는 특출난 재능은 없었고, 대학도 재수를 하여 들어가고, 공무원 시험도 3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매년 국가직-지방직-서울시를 쳤으니 9번의 시험을 친 셈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늘 남들과 같거나 더 많은 것을 지불하고 성취하는 전형적인 ‘범재, 혹은 그보다 조금 아래’ 그게 나에 대한 나의, 그리고 주변의 평가였다.


   반대로 동생은 한 배에서 태어났으나, 외모가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말 다른 사람이다. 동생은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서, 특히 음악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분야로 가는 것보다 본인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다며, 교육 분야를 선택해서 한 번의 재수생 생활 없이 서울교대를 들어갔다.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수재’ 이게 동생에 대한 주변의 평가였다.


    이렇게 능력적으로 다른 두 형제가 같은 가정에 있으면, 우습게도 7살이나 나이 차이 나는 형이 동생에게 자주 느끼는 감정은 다른 정상적인 형제들과 다르다. ‘형제애’보다는 지독한 ‘질투’다. 이 질투라는 감정을 처음에는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었지, 머리로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동생이랑 나는 동전의 앞뒤만큼이나 맞지 않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이게 질투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은 동생은 대학생 새내기로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된 27살 때부터였다. 가장 인생의 아름다운 시기라고 볼 수 있는 스무 살의 동생과 20대의 가장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울화가 터진 것이다.


   질투는 그렇게 점점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공무원 수험생활 막바지에 이른 29살 즈음, 곧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한 압박이 생기면서, 이 감정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있었다. 심지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2017년 마지막 서울시 시험에 어처구니없게도 시간을 잘못 써서 급히 마킹한 나머지 4과목과 5과목을 바꿔 마킹한 일이 있었다. 제대로 마킹했다는 가정하고 채점을 해보니 1배수에 들어갈 꽤나 괜찮은 점수였다. 여기가 시작점이었던 거 같다. 애써 이성으로 눌러왔던 괴물이 세상 밖으로 나온 시작점이.


    보통 그 괴물이 하는 짓은 이렇다. 부모님들이 취업 얘기를 하면 전혀 연관이 없는 동생 얼굴이 지나가면서 사람이 날카로워지고, 동생이 가끔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와 쉬는 날이면 그 모습이 너무 꼴보기가 싫어 피하거나 늘 툴툴거리는 말투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가 아무 이유 없이 쌓이고 그걸 먹는 것으로 풀다 보니 살이 쪘다. 그리고 이 열등감과 질투가 밤에 잘 때쯤 되면 수치심으로 변해 나를 갉아먹었다. 낮에는 가족을 갉아먹고, 밤에는 나를 갉아먹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런식으로 천천히 나는 나를, 그리고 나의 주변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을 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끊었다. 가끔 너무나 속이 답답할 때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다. 숨을 크게 쉬고 바라보는 바다는 뭐든 품을 듯이 넓었다. 그 옆으로 작고 허름한 배와 크루즈처럼 크고 화려한 배가 지나가는데 그게 마치 나와 내 동생의 모습 같아 보였다. 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작은 배는 흔히들 말하는 통통배였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배가 ‘운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녹슨 곳도 하나 없이.


    그렇게 멍하니 바다를 보며 한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다른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저 작고 허름해 보이는 배가 내 모습 같은 게 아니라, 내가 저 배보다 못할 수도 있다. 적어도 저 배는 작지만 자기만의 속도로 항해를 하기 위해 선주가 늘 관리를 했을 것이다. 선주는 하루하루 바다로 나가기 전에 저 배를 정성스럽게 돌봤으리라.


    ‘나’라는 배가 있다면 그 배는 관리도 안된 채 목울대부터 발끝까지 녹이 슬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지옥에서 나갈 실마리가 나온 것 같았다. 눈물이 났다.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조금은 마음이 후련해져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문제집을 들고 문제를 풀었다. 그러다 지금은 내 인생의 시가 된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를 만나게 되었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자괴감에서 시작한다. 그 자괴감은 온전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을 멀게 한다. 어찌 보면 연애할 때 씌워지는 콩깍지보다 더 강력한 콩깍지가 씌워진다. 그래서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리’거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간다.


    그렇게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데서 오는 질투라는 감정이 뿌리를 내리고 내 삶의 깊은 곳까지 닿는다면, 삶의 기반을 흔들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삶의 끝은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라는 구절로 나타난다. 당연하다. 나부터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데 누가 나를 사랑해주며, 누가 나를 두려워할까. 이 시구가 두렵고 또 두려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뭐냐 묻는다면 마지막 두 줄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를 꼽을 것이다. 이 시의 제목 ‘질투는 나의 힘’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모든 과정을 다 겪고 질투라는 감정을 용기를 내 정면으로 마주 보고, 나와 화해하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저런 시구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질투는 더 이상 숨겨야 할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정신적인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가 자신을 ‘배 아픈 가수’라고 소개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아마 많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어마어마한 질투를 느꼈을 것이다.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거치고 본인을 사랑하는 지점에 왔기 때문에, 그도 본인을 ‘배 아픈 가수’라고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한 인터뷰에서는 ‘질투는 창작자에게 감사한 요소’라고 말한다. 질투가 삶의 자극이자 동력이 된 것이다.


   비슷한 과정을 겪은 나 역시 질투를 또 다른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분이 묘했다. 영화에서 보면 몇 년간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장면이 있던데, 그가 일어났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질투는 그냥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겠거니 하며 안고 가게 되었다. 크루즈는 크루즈의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고, 통통배는 통통배의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면 되는 거다. 동생이라는 크루즈를 부러워 하기보다는 나라는 통통배를 소중히 하기로 했다. 통통배는 통통배의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도는 더뎠지만, 적어도 다시 뒤로 가지는 않는 하루하루가 쌓였다. 실질적인 문제에 정면돌파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망가진 몸부터 바로 잡았다. 규칙적으로 생활만 해도 4kg이 빠졌다. 운동을 병행하니 8kg이 우습게 빠졌다. 공부도 이제는 기계적으로 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닐 때보다 치열하게 계획하고, 일지를 써서 하루하루를 비교했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그래, 이거지...’라고 무릎을 여러 번 쳤다. 또한 옆에 있는 동생은 가장 쓸만한 아군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되려고 하는 녀석답게 설명이 깔끔했다. 동생이 집에 올 때면 옆에 붙여놓고 도움을 받았다. 공시 생활은 늘 마지막 순간이 힘들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 한 해가 공시 생활 3년 중 제일 행복했다. 합격은 그저 부산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은 이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 집에서 펼쳐지고 있다. 동생이 임용고시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면접에서. 처음으로 세게 넘어져 본 탓일까, 내상이 매우 심해 보인다. 이제까지는 자기가 노력하면 어지간한 것들을 취할 수 있었던 녀석이 풀이 팍 죽어서 집에서 콕 박혀 있는 걸 보면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짠해진다. 못된 것만 형한테 배워서 몇 개월째 신경도 날카롭다. 아마 지금 동생의 질투 대상은 먼저 합격한 동기들 일 것이다. 그가 하루라도 속히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내가 먼 길을 돌아 이른 화해의 바다에 나보다는 조금 일찍 당도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그 뜨거움으로 혼돈을 깨고 인생의 제2막을 새로 써보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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