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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Oct 29. 2024

20. 미움도 결국 에너지라서

세상에는 이해의 수준을 넘어선 악이 존재합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우리의 삶에서도 악질적이고 양심 없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심판받거나 비난받아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까지 완전히 마음을 닫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과 행위를 분리할 줄 알게 될 때 진정 영혼이 멀리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따뜻하게 포용하고자 하는 마음 상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중략)... 사람과 행위는 얼마든지 분리할 수 있습니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다산북스


   같은 책을 읽은 친구와의 대화 중에 이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친구가 흥분상태에서 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작가가 스님이고 나는 그냥 일반인이라 뭔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난 이 말은 죽어도 동의 못한다. 이 사람도 자기 가족이 험한 일 당해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내가 이래서 종교가 싫어, 자연스럽지 못한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잖아. 화를 내야 할 때는 내야지."


    고백하자면, 나도 약한 강도의 미움과 증오는 인생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긴 했다. 학교와 회사에서 안하무인으로 우쭐대며 여러 사람 건드리는 인물을 향해 때때로 흐릿하게 미움을 품음으로써 경쟁에서 그를 이길 수 있었고, 만만해 보이는 후배만 골라서 승냥이처럼 괴롭히는 선배 앞에서 종종 날카로운 감정의 칼을 들이댐으로써 권리와 이익을 지켜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친구도 그런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미움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미움은 일상에서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큼이나 흔하다. 미움의 대상은 심지어 보통 먼 곳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던 사랑이 빠져나간 뒤 그 자리에 미움이 채워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장이 직장이다 보니 여러 형사 사건의 당사자들을 많이 만나보며 들었던 결론은 하나다.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기 위해서는 본인도 죽도록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그 사람을 미워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돌볼 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마음의 에너지는 무한정으로 흐르지 않을진대, 타인을 미워하느라 그 한정적인 에너지를 내가 아닌 남을 향해 쏟아내다 보면 정작 힘을 내야 할 순간 아무것도 못하고 무너지는 수가 있다.


   미움에 대한 조금 극단적인 경우를 다룬 영화하면 난 늘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 내 생각에 적어도 한국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미움과 화를 해결하기 위해 개신교에 귀의한 한 어머니, 신애가 정신적으로 극복하고자 마자막 방법으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아주 큰 결심을 하고 교도소에 가서 유괴범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의 유괴범의 한마디가 신애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


   이 한마디로 신애는 마음에서 다른 감정을 모조리 몰아내고 오로지 증오만 쌓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갈 길을 잃은 미움과 증오는 오롯이 신애 자신에게 돌아와 신애를 망가뜨린다. 지렁이를 보고 발작하듯이 놀라서 운다거나, 오밤중에 갑자기 일어나서 준이가 납치된 날 유괴범과 통화하던 모습을 토씨 하나 틀린 것 없이 반복한다거나, 신에게 보복하듯 고의적으로 죄악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물건을 도둑질하고, 다른 교회의 집회를 방해하고,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는 교회 집회에 <거짓말이야> 노래 CD를 트는 기행을 저지르고, 나아가 자신을 교회로 끌어들인 장로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간통 미수를 저지르게 유도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하늘 위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 신을 바라보며 대드는데, 그 과정에서 환시, 환청, 환촉 등 정신질환자들이 흔히 겪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에너지가 모두 미움이라는 것에 쏠린 결과물이다.


   이 영화를 보면 신애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도 되는 부분이라 마음이 내내 불편하다. 다만, 하나는 안다. 결국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 신애가 피를 흘리며 새벽의 거리를 뛰쳐나갈 때, 그녀가 했던 한 마디는 결국 "살려주세요."였다는 것에 힌트가 있다. 결국 살려면 있는 힘을 다해 마음에서 미움을 뽑아내야 한다는 것. 물론 신애처럼 미움이 너무 깊이 박혀버렸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미움이 하나로 포개져서 둘을 분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쉽지 않겠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신애만큼 극단적 상황은 아니리라 믿는다.


    평정심을 잃고 일을 그르친 후 '아,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를 뒤늦게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 대화를 나눈 내 친구처럼 지금 당장은 이 말이 몹시 신경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절대 다시 받아들일 수 없는 누군가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 역시 있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화해와 용서는 그렇기에 어렵다. 다만 가까운 시일 내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미움과 마음이 분리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다 뽑아내는 날이 오길, 그 아까운 에너지가 나를 쓰러뜨리는 데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일으키는 데에 쓰이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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