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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 Mar 28. 2018

18. 작별소감

함피


함피에 지낸 지 일주일, 방갈로르로 떠나는 저녁이 다가왔다. 일몰을 보러 나가는 카츠야상과 따뜻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리안, 지현과 마지막으로 끼니를 때우러 망고트리 레스토랑을 찾았다. 함피도 이제 끝이구나... 왠지 모르게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팔라펠을 주문했다. 짜파티를 찢고 팔라펠 조각을 채워 입에 구겨 넣으며 건너편에 앉은 리안의 뒤통수 너머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세 시간... 두 시간 반... 기차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을 세며 지난 함피에서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한 것이 별로 없었다. 알람을 놓쳐 늦잠 자고 일어나 해가 뜨기 전에 마탕가힐로 달리던 새벽, 장소는 달랐지만 매일같이 챙겨보던 일몰, 그리고 해를 피해 깔리얀 게스트하우스의 처마 밑에 한 줄로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낮 시간들. '여행을 했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나중에 떠올릴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 만족했다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문을 나섰지만 이번에는 가는 길이 서로 달랐다. 한동안 같이 지내던 친구들과 허무하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만날 때도 느닷없었지만 헤어지는 인사는 더 갑작스럽다. 어색한 미소를 나누고 몸을 돌려 버스정류장을 향하는 순간 나는 다시 혼자 걷는 배낭여행자가 되었다. 어쩌면 필요했던 시간이 왔는지도 모른다. 혼자가 되는 것도 여행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니까. 게다가 나는 인도 여행을 시작한 이래 지난 2주가 넘도록 누군가 계속 함께 있었고.

해가 완전히 지고, 불빛 없이 까만 버스 스탠드에 혼자 멀뚱멀뚱 서있다 곧 도착한 기차역행 로컬버스에 올라타 멀찌감치 위치한 오렌지색 조명을 받는 사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주마등과 함께 지난 일주일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번에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여기 함피에서 만난 사람들.


다이스케,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시간을 포함해 2년 반 동안 세계를 떠돌고 있는 여행자. 리안과 깔리안 게스트하우스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다 친해졌다. 나중에는 일출, 일몰을 같이 보고 유적지도 함께 찾아다녔다. 2달러도 안 되는 도미토리에 묵고 로컬버스만 고집할 정도로 하드코어 여행자이지만 뜬금없이 7달러 넘게 주고 머리를 땋는 모습도 보였다. 시크하지만 정 많고 젠틀했던 츤데레.

유카리, 전형적인 카와이 일본 여자. 고아에서 사 온 젬배를 가지고 다니며 "음악 틀어줘! 음악!"을 연신 외쳐댔다. 곧 음악이 흘러나오면 배우지도 않은 젬배를 투닥거리며 리듬을 보탰다. 작은 체구에 반전이라면 소프라노 오페라 싱어라는 것 정도랄까.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했지만 무례할까 싶어 노래 부탁은 하지 않았다. 헤어지는 날 연거푸 내 이름을 부르며 아쉬움 섞인 인사를 전했다.

카츠야, 카츠야상. 올해 58세의 아저씨 여행자.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다. 20년 전에 북인도를 여행했고, 지금은 기회가 닿아 남인도를 여행 중이다. 첫인상은 담배만 뻐끔 피우며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묵묵한 아저씨였지만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 "영어를 잘 못하는데..." 라며 말문을 연 그는 시종일관 정보와 경험을 쏟아내는 천상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예정에도 없던 마두라이를 가게 되었고, 폰디체리에서 바이크를 빌려 오로빌을 여행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겸손한 성품으로 젊은 여행자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내 모습을 비춰보기도 했다.

료타, 스물한 살의 젊은 여행자.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일본어로 인사를 건네며 말문을 텄다. "지난주 고아를 여행하던 중에 부모님이 이혼했어." 웃으며 그가 던진 한 마디. "잘되었다고 생각해. 지난 2년 동안 둘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각자의 인생이 있는 거잖아. 나도 그렇고." 젊은이가 꺼내는 치기 어린 인생 이야기가 어른스럽게 느껴져 귀여웠다.

리안, 졸업에 한 발 걸쳐두고 동남아와 인도를 여행 중인 여행자. 짝꿍처럼 함피에서 시간을 같이 보냈다.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거리 있게, 함피를 같이 걷고 보면서 추억을 쌓았다. 케어해줘야 할 것 같은 여동생 같다가도 패기 있는 독립심이 가끔씩 엿보였다. 문 닫는 거 보고 나온 고아였기에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가서 자기 눈으로 보아야겠다는 걸 보면 보통이 넘는 고집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하긴, 4년 전, 두 달 동안 필리핀에서 함께 지낸 일본 친구 유지와 헤어질 무렵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다음 생에서 보자!". 무지막지하게 큰 지구에서 우리가 다시 마주치긴 어려울 거라는 불안이 부른 체념이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다음 생은커녕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싱가포르에서 한 번, 한국에서 두 번, 그리고 태국에서 또 한 번을 만났다. 인생은 짧다지만 사실 길고 기회는 많으니까, 기대를 품고 마음으로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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