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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05. 2019

디톡스 : 여행의 의미

치앙마이 한 달 살기

"그나저나, 너희 어디서 왔어?"


게스트하우스에서 낯선 이와의 대화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2-3일 정도 공용 공간에서 마주쳤던 Subi가 어느 날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고,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Subi는 핀란드 출신이었고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거쳐서 치앙마이까지 긴 여행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우간다에서 자원봉사로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었고, 우리는 해외 봉사활동을 인솔하거나 교육계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어서 공통의 관심사를 쉽게 찾았다.


자원봉사와 여행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교육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졌고,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해도 깨뜨릴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이 있다고 느끼는 무기력함이 특정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건강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있는 EFT(Emotional Freedom Technique)의 방법들을 알려줬는데, 우리가 듣기에는 한방의학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흘렀고 홀에는 우리만 남아있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이름을 물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네 이름이...?"


셋 중 누군가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우리는 동시에 빵 터져버렸다.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서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기 직전에야 이름을 묻다니.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채로 아프리카와 핀란드, 동남아와 한국의 여러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눴던 것이다. 게다가 끝까지 서로에게 궁금해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이.


요즘 들어 나이를 따지지 않은 자리가 소중해진다. 경험상 나이를 따지거나 중요하게 작용하는 공동체는 폐쇄적인 특성을 지닌 곳이 많았다. 여러 해를 근무했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사범대를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용되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는 그 이후의 삶도 당연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몇 년 정도 근무를 하다가 같은 교사이거나 안정된 직장을 가진 짝을 만나 결혼하고 결혼한 지 2년 정도 되면 아이를 낳고 아이는 둘 정도 낳는 경우가 당연한 '보통'인 삶. 그곳에서 이중전공 과목으로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근무한 지 6년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나는 보통이 아닌 경우였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보통이 아닌 삶을 사는 것은 눈에 띈다. 눈에 띄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보다 많은 질문을 받게 된다. 한 번은 다른 동료가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을 돌렸는데, 책상 위에서 그것을 펼쳐보던 분이 나에게 질문했다. "하루씨는 언제 결혼하나?" 그분은 내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거나 어떤 연애관과 결혼관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하지만 내 나이쯤이면 결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기에 아무런 맥락 없이 그런 질문이 나왔을 것이다. 이런 경우 나이는 종종 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Subi와의 대화에서는 그런 판단이 끼어들 공간이 없었다. Subi는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보낸 시간과 경험들을 흥미롭게 여겼고, 우리도 Subi의 과거와 계획을 편견 없이 경청했다. 그 과정에서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삶에서 얼마나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고 어떻게 달랐는지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Subi는 내일 아주 흥미로운 마사지를 받을 계획이라고 했다. 복부 마사지를 예약했는데 단순한 마사지가 아니라 내장 기관을 마사지하는 특별한 디톡스 과정이라면서.



어쩌면 여행 자체가 디톡스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존재하는 시간. 여행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 어떤 것이든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내 안에 쌓여왔던 것들을 씻어내고 나를 오롯이 관찰할 수 있는 하루가 더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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