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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Aug 31. 2019

코드 스위칭, 준비 완료

치앙마이 한 달 살기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시작할 그곳. 시작부터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6시간의 비행, 3시간 30분의 경유, 또다시 1시간의 비행을 거쳐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20킬로가 넘는 짐을 지고 11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Baan Heart Thai. 태국어에서 Baan은 '집'을 뜻하니 이곳은 아마도 태국의 따뜻한 마음이 머무는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적갈색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를 반긴다.


호스텔의 공용공간은 앉을자리를 넉넉하게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합격점이었다. 둥근 테이블을 둘러싼 의자들은 일행이 함께 기다리기 좋고, 벽을 향해 늘어선 의자들은 혼자서도 시간을 보내기 좋다. 그중에서도 6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은 호스텔 공용공간의 필수 아이템. 편의점에서 간단한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커다란 테이블에는 호스텔 오너 ‘케이시’로 추정되는 인물과 두 명의 여행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치앙마이에 도착한 첫날이자 도미토리에서 묵는 첫 날밤이었다. 이런 날을 그냥 보낼 수 없지. 간단한 인사를 거쳐 그들의 대화에 합류했다.


케이시는 조용하지만 능숙하게 대화를 조율했다. 치앙마이에 대해서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면 설명을 해주다가도 손님들끼리 대화가 이어질 때는 조용히 지켜보는 식이었다. 치앙마이, 그리고 이 숙소를 찾아온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내공에 감탄하는 사이 그녀가 3개 국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른편 남성과는 중국어로 대화하고, 건너편 여성과는 태국어로, 우리와는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각자 다른 언어를 배우게 된 계기와 경험을 털어놓다 보니 어느새 건너편에 앉은 그녀는 일본어, 영어, 태국어를, 우리는 영어, 일본어, 라오스어를 섞어서 대화하고 있었다. 세상에, 3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흔한 것이었나! 우연히 그 테이블에서 만난 인연이었지만 모두 언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보통 이상인 것이 분명했다.



어떤 언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는 것은 마치 암호를 주고받는 기분이다.


비슷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기호를 사용하는 것. 그래서 다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이 마치 암호를 다루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학창 시절 6년 동안이나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일본어는 그런 기분으로 선택하기에는 희소성이 떨어지는 언어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할머니의 말속에 숨어있었던 단어를 찾아내는 기쁨과 신기함, 거기에 암호로 대화하는 듯한 설렘이 더해졌다. 하지만 암호란 사용하지 않으면 불필요해진다. 드라마와 영화는 거의 다 알아듣고, 말하기 대회와 자격증을 준비할 정도로 몰두했지만 막상 대학을 다른 전공으로 진학하고 나니 일본어를 쓸 일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일본어로 말하고 쓰던 내 모습 자체가 옛 사진의 한 장면처럼 아련했다. 쓸 일이 없으니 잊어버리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대 후반 처음으로 떠난 일본 여행에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가 예고 없이 불쑥,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다. 여행의 끝 무렵에는 영어나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장기기억을 설명할 때 예시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운전 능력이다. 완벽히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몇 개월, 또는 몇 년 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운전대에 앉는 순간 자연스럽게 예전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 일본어를 손에서 놓은 지 근 10년 만에 떠난 여행에서 그런 순간을 경험했다. 상대방의 말에서 아는 단어를 조합하고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은 지킬과 하이드의 변신을 지켜보는 것처럼 신기했다. 그때부터 여행은 다른 언어를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 되었다.


케이시의 건너편에 앉은 그녀는 방콕에서 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회사에서 태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키우기 위해 자신에게 일종의 투자를 한 셈이라고 했다. 4개월 만에 케이시와 불편함 없이 대화를 나누는 그녀를 보면서 여러 가지가 부러워졌다. 자음이 44개, 모음이 32개인 데다가 성조가 다섯 가지나 되는, 그래서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유명한 태국어를 몇 개월 만에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녀의 언어 능력도, 직원에게 1년 정도의 시간을 주고 투자를 하는 회사의 정책도,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혼자서 태국을 여행하고 있는 그녀의 자유로움도.




우리는 하나의 테이블에서 몇 가지 언어가 오가는 것이냐며 웃었다.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다른 언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인 듯 자신의 언어를 꺼내고 비교하며 재미를 찾았다. 태국 북부 지방 사투리와 방콕의 태국어를 비교하다가 라오스 북부와 남부의 언어 차이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라오스 북부와 치앙마이의 언어가 얼마나 닮았는지 맞춰보기도 했다. '약'이나 '말'처럼 한국어, 일본어, 태국어, 중국어가 모두 비슷한 단어를 찾기도 했다. 언어로 시작한 이야기는 음식으로 넘어가고, 결혼이나 미래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평균 기대 수명이나 물가는 다르지만 결국은 닮은 이야기들.


여러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상황이나 습관에 따라 언어를 바꾸는 현상을 언어학에서 코드 스위칭(code-switching)이라고 부른다. 덕분에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의 코드를 선택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코드 스위칭은 몇 가지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언어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능력의 증표이기도 했다. 원하는 순간 원하는 코드로 스위칭하는 능력은 그만큼 유연한 자세를 요구한다. 숙소 외에는 아무런 계획이 없어 모든 것이 즉흥적일 한 달 살기이지만 한 가지 목표가 있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지금보다 더 유연한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인지 여섯 개의 언어가 오가는 테이블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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