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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03. 2019

우연히 발견한 티켓처럼

치앙마이 한 달 살기



낮은 도시를 사랑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낮은 도시의 풍경을 사랑한다. 낮은 도시는 대부분의 건물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보이는 도시다. 배낭을 메고 길을 걸을 때 주변에 보이는 집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조금만 높은 곳을 찾아가도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그런 동네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담장에 그려진 낙서까지, 우연히 핀 꽃잎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서 낮은 도시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이 정도로 낮은 풍경은 아니고...
이 정도의 풍경들?



이런 나의 취향을 아는 지인들은 예전부터 치앙마이를 언급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마지막에 치앙마이가 나왔다. 치앙마이 좋아요, 하루씨한테 딱일 것 같은데. 아직 안 가봤어요? 특히 치앙마이와 나를 모두 아는 지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치앙마이를 가보기는 하겠구나, 라는 마음이 되었다. 정확하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언젠가 인연이 닿을 것 같은 그런 막연한 기대감.


하지만 나는 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었다. 4-5년 전에 다녀온 방콕 여행이 남긴 고정관념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방콕은 엄청난 대도시였고 내가 좋아하는 '낮은 도시'와 거리가 멀었다. 맛집이라고 기대하고 찾아갔던 곳들의 음식은 대부분 달았고 가끔은 첫 술을 입에 넣자마자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단맛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여행을 할 때 항상 '이곳을 다시 찾아올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방콕 여행을 하면서는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누가 방콕 여행이 어땠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 항상 꽉 막힌 도로, 정신없는 번잡함, 강렬한 단맛, 쇼핑, 쇼핑, 그리고 또 쇼핑. 그게 방콕인 것 같아.



*


인연이라면 언젠가 닿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억지로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인연이 있다고.


2019년 6월, 여행을 떠날 때가 왔다. 한 곳의 직장에서 6년 동안 영혼을 불태우고 퇴사한 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나는 자유로운 몸이다!'라고 신나게 외치던 시기는 지나갔고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퇴사 후 제대로 된 여행도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떠날 곳을 찾고 있었다. 한정된 예산과 내가 좋아하는 '낮은 도시'라는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여행지를 찾다 보니 자꾸 다시, 치앙마이가 나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치앙마이를 가야 할까? 지금까지 여행지를 고를 때 논리적으로 딱, 딱, 따져보니 여기로 가야겠네요,라고 결정해서 떠난 적은 없었다. 여러 모로 최적의 여행지라고 판단이 되어도 정말로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예열하는 시간. 나는 그 시간부터 이미 여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


우선 치앙마이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숨겨진', '뚜벅이', '골목' 같은 단어로 검색하며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찾아 읽었다. 인터넷 카페 같이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생각보다 자료가 많지 않았다. 개인의 공간에 올린 후기들이 대부분이어서 그중에서도 나와 취향이 통하는 사람의 글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 지역에서 평이 좋은 숙소 후기를 찾아 읽으며 불편한 점과 기대할 점을 파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전형적인 여행 정보를 정리해 놓은 가이드북에서는 어떤 점을 어필하고 있는지 따져볼 차례였다.


가이드북은 가장 최신 버전을 구입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그 때까지도 치앙마이를 가고 싶은 마음에 불이 붙지 않아서 굳이 돈을 주고 여행 책자를 사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 있는 가이드북만 빌려서 어떤 분위기인지만 알아보자, 그런 심정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 있던 치앙마이 여행 책자 세 권을 가지고 근처 카페에 갔다. 서로 다른 느낌의 여행 책자를 훑어본 뒤 치앙마이를 정말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다.


빌려온 세 권 중에서 마지막으로 트립풀 치앙마이를 꺼내 들었다. 트립풀 치앙마이는 트립풀 시리즈 중에서도 두 번째로 나온 것인데, 당시 시중에는 절판된 책이었다. 평소에도 트립풀 시리즈를 좋아해서 인스타그램에서도 소식을 꾸준히 받아보고 있던 차라 기대를 했다. 여유 있는 크기 덕분에 큼직큼직하게 실린 사진들, 귀여운 일러스트로 표현된 지도와 이미지 덕분에 조금씩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는데, 그곳에 덩그러니 치앙마이행 티켓이 꽂혀있는 것이 아닌가!



치앙마이로 향하는 길에서 그녀의 설렘, 두근거림, 기대와 걱정. 티켓을 발견한 순간 이런 감정까지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결심하는 데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순간이 또 있을까?


치앙마이로 떠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린 여행 책자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치앙마이행 비행기 티켓을 발견했다. 마치 누군가 열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덩그러니 그곳에 티켓이 있었다. 티켓을 발견하는 순간, 티켓을 손에 쥐고 경유할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책을 넘겼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치앙마이에 도착하기 직전 여행에 대한 설렘과 두근거리,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여행 후기와 숙소들을 찾아보고, 빌려온 여행 책자를 살펴보면서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치앙마이에 대해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푸른 나무와 높은 하늘이 빠지지 않는 낮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과 예술, 커피가 어우러진 곳. 쉬어가려고 왔다가 머물게 되는 곳.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우연히 발견한 비행기 티켓이 예열된 마음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방콕을 경유해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다, 티켓의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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