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열어주는 감각의 지평
거제로 이사 오고 나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놀라는 점이 있다. 바다 근처에 살면서 자연을 가까이 해서 그런 것인지, 아이들이 참 순수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아이들이 나와 얼굴을 튼 사이도 아닌데 먼저 인사를 해주어서 놀라서 나도 더 크게 인사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부터는 아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데, 그 때마다 아이들은 참 잘 받아주었다. 아이들이 노는 것만 봐도 도시에서 본 아이들의 표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집 근처 해수욕장에 아이들끼리 놀러 와서 조개나 소라, 집게 등을 잡고 깔깔대며 웃는 것을 보면 절로 같이 기분이 좋아진다. 키즈카페가 아닌, 바다와 모래에서 노는 아이들의 표정은 정말로 더 자연스럽다.
토요일마다 초등학생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이곳 아이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많이 궁금했는데 아이들이 써내는 글들에서 그 답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떤 아이는 싫어하는 것을 써 보라고 했을 때, '북적북적한 도시'라고 써 내었고, 또 다른 아이는 시를 바로 써 보여주겠다며 '윤슬'을 가지고 얼른 시를 써서 보여주었다. 좋아하는 것으로 '가을 바다'를 꼽았던 아이도 있었다. 이미 어른이 된 나도 바다의 일몰을, 빛나는 윤슬을, 바닷가에서 떠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트이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는데 이런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얼마나 생각들이 트이게 될까. 아이들에게서 청아한 느낌들을 받게 된 데에는 그런 자연의 정서가 아이들에게 깃들어서임이 분명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늘 바다란 동경의 대상이었다. 바다에 간다는 건 특별한 일이었고, 그래서 늘 더 애틋했고,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 정서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애잔한 동경으로 남아서, 바다의 파도 소리를 늘 그리워하며 바다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 닿고 싶어도 쉽게 닿지 못하는 곳, 사진첩에 담아두고 항상 꺼내어 보고 싶은 곳, 그렇게 상상하다 내 머릿속에서 더 애틋하게 자라나는 곳으로. 그랬던 내가 바다에 살고 나니, 이제는 애틋함이 아닌 포근함으로 바다를 기억하게 되었다. 언제든 나를 품어줄 수 있는 곳,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면 나를 맞아주는 곳, 그리고 상상이 아닌 눈 앞에 실재하는 나의 안식처로. 바다 곁에 살게 되니 나의 감각도 바다와 함께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변화만 두고 보아도 사는 곳에 따라 감각이 변한다는 것을 체감하는데,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감각은 그간 도시에서 봤던 아이들과 당연히 다를 것이었다. 물론 이곳의 아이들이 매일 바다와 함께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친구들과 걷다 도착한 곳에 바다와 모래가 있는 곳에 산다는 건 건물들 뿐인 도시에 사는 것과는 다른 감각을 지니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수업 시간에 준 초콜렛 하나를 먹고서도 '왜 초콜릿은 사탕처럼 오래 녹여먹지 못하고 금방 끝나는 걸까?' 하는 말랑말랑한 질문을 던지는 아이처럼, 오감으로 자연을 느끼고 체험한 아이들은 생각도 말도 더 유연해지기 마련이다.
거제에 오고 나서야 비로소 살고 있는 곳이 주는 감각을, 정서를 더욱 깨닫게 되었다. 매일 달라지는 풍경의 하늘을 보면서 감사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을, 맨발로 모래를 밟았을 때의 까슬까슬함이 주는 매력을, 바다에 비친 윤슬이 어떤 빛보다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건 직접 보고 느끼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 아이들은 세상을 볼 때 이것저것 더 세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자연을 통해 감각이 이미 열려 있으므로.
거제와 통영에서 지내면서 왜 이곳에서 많은 예술이 피어나는지 잘 알 것 같다. 감각이 열리면 그 감각이 만들어낸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질 테니까. '나 자신'이 아닌 '내가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요즘인 만큼, 그런 생각들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곳에 산다면 아이들의 정서는 더욱 더 영역을 넓혀갈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제살이 10개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