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 인정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어느덧 지금 일하고 있는 곳에서의 계약 기간이 끝나간다. 사실 거제에 내려와 살기로 다짐했을 때에는 '돌봄'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던 때였기에, 가족들을 살펴보며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음악제를 준비하는 재단에서 일하게 되었고, 서른 둘에 인턴으로 일하면서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 몫을 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 같다. 어딘가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운 지금이라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분야의 일을 해보는 경험이 사뭇 색달라 몸은 힘들었지만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 내려오기로 했던 때의 다짐처럼, 이곳에서의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좀 쉬면서 지내보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기간제로 또 다른 조직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 일하던 게 몸에 배어 있어서인지, 쉬는 게 적성에 통 맞지 않는 것인지 이곳의 기간이 끝나가니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일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다 공고를 발견한 것이었다. 문득 생각보다 지역사회 내에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큰 돈 벌 것만 아니라면 어디든 일할 곳은 있겠다는 것이 이곳에서 살면서, 일하면서 느끼게 된 것.
누군가는 연봉을 받던 8년차 직장인이었던 내가 최저시급을 받는 인턴이 된다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내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인턴으로 일 할 수 있는 '청년'의 범주에 들어갈 날들이 길게 남은 것은 아니니까, 지금 이 시기를 누려도 되지 않을까!) 언젠가는 연봉이 내 몸값을 나타낸다고 생각해서 그 몸값 한 번 올려보려 회사도 옮겼다가, 오르지 않는 연봉과 평가에 마음 앓이를 했다가, 친구네 회사와 복지를 비교하기도 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바깥에서 찾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정말로 '일 다운 일'을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일로 인정받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으니, 외부적인 가치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안정된 가정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일. 언젠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외부적인 가치가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켜갈 수 있는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지금 내게 중요한 일이다. 그러려면 안타깝게도, 조직 내에서 속하여 1인분을 해 가면서 가정을 살피기란 지금 내게는 역부족이라고 느꼈고, 내가 나를 다치지 않게 지켜가면서 가정을 꾸려가는 방법으로 지금의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제 '일로 인정받는 나'는 회사가 주체가 아니다. 내가 쓰는 글이 스스로도 만족스러우며 누군가에게 읽히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나의 모습이 내가 바라는 일이다. 더 나아가서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함께 '쓰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다행스럽게도 이 가치를 실현해줄 수 있는 제안이 왔고, 올 여름과 가을에는 도서관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며 내가 원하는 가치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애써 발버둥치지 않아도 내게 여유가 생겨나니 일이 조금씩 다가온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있다.
이곳에서 살 다짐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혼이 이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면 생각도 하지 못했을 변화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지금이 꽤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