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하지만 찬란한 여름, 거제
거제에 산 지 6개월,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거제에 살면, 특히 여름이 오면 매일을 여행하듯 살 수 있다. 조금만 나가면 모래사장이 드넓게 펼쳐진 구조라해수욕장이 있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파도가 칠 때마다 천둥처럼 웅장한 몽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몽돌해수욕장이 펼쳐진다. 작지만 문동폭포도 있어서 산 속 계곡도 만날 수 있는 곳, 거제. 우리는 여기 살고 있다.
7월 초까지만 해도 붐비지는 않았던 거제의 해수욕장들은, 중순 즈음부터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라 휴양지 같은 느낌이 제법 든다. 거제의 해수욕장이 좋은 점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많아서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 아이를 안고 바다에 뛰어드는 아빠들, 그런 가족들을 카메라에 담는 엄마들, 그리고 그늘에서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는 조부모들까지 그 평화로운 가족 여행의 모습을 한껏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해수욕장에 자리를 펴고 앉아 그런 사람들의 모습들을 바라본다. 바다만 보는 것보다 그 바다를 즐기는 각자의 모습들이 더 재미있고 왜인지 애틋하다. 더 바다에 머물고 싶다고 떼쓰며 파도에 몸을 맡기는 아이들이, 어릴 때로 돌아간 것처럼 물장난을 치는 어른들이, 햇빛과 파도에 맞추어 예쁘게 피어난 구름까지. 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이 푹푹 찌는 여름마저 애틋해진다.
체력과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바다에 데려가는 남편 덕분에 그 풍경들을 꽤 많이 눈에 담아왔다. 집을 나설 때마다 평생 볼 바다를 여기 사는 동안 다 볼 듯하다며, 도시에 살 때는 바다에 가는 것이 소원이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바다를 지척에 두고 원하는 때마다 갈 수 있게 되었는지 매번 새삼스럽다. 우리의 차 트렁크에는 항상 크록스와 비치타올, 돗자리가 구비되어있다. 언제 또 바다로 나갈지 모르니까. 퇴근길에 바다를 향해 뛰어들 수 있는 거제에 살고 있으니까.
여름의 거제는 일몰도 아름답다. 저녁 7시가 지나면 어스름이 시작되어 조금 기다리면 여기저기에서 일몰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자주 찾는 곳은 집 앞 해수욕장이다. 어떤 날에는 분홍과 보라가 섞여 경이로운 하늘을 보여주는 곳이어서 퇴근하면서 일몰을 보고 싶은 날이면 집 앞 바다로 향한다. 그것도 귀찮은 날에는 집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으니 멍하니 바다와 하늘을 바라본다. 여행할 때가 아니면 이렇게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있었던가. 이제는 매일을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었다. 매일을 여행하듯 살아갈 수 있는 거제의 여름을 즐기게 된 요즘은, 평생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우리에겐 정말 귀한 시간이다.
저번 주말에는 해수욕장 세 곳과 거제의 계곡까지 모두 들렀다. 오늘만큼은 진짜로 여행하듯 거제를 다 돌아보자는 마음이었다. 이번 해에는 여름휴가를 따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 거제를 마음껏 돌아다니며 즐기는 것으로 휴가를 대신해보자며 집을 나선 주말. 우리는 이날 처음으로 바다에 온몸을 담갔다. 그간 정강이까지만 참방대며 발을 담갔다가, 태풍이 지나간 뒤라 파도가 꽤 높아져 파도를 즐기기에 좋아보였던 이날은 왜인지 뛰어들고 싶었다. 시원한 바닷물이 엉덩이까지 오는 곳에 서서 파도를 기다렸다. 높은 파도가 우리의 뒷통수를 시원하게 덮쳐왔다. 지난번에 예약했다가 사정상 가지 못했던 워터파크의 파도풀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파도를 맞다가, 또 모래에 앉아 모래놀이를 하다가 또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것, 바캉스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모래가 묻은 발을 털고 몸을 씻어낸 우리는 하루 종일 달궈진 열을 에어컨 바람에 식혔다. 여름 휴가가 바로 이런 것이었지. 7년을 연애했지만 여름 휴가를 따로 떠나본 적 없던 우리에게 올해 여름은 정말 매일이 바캉스처럼 다가왔다. 그간 못 떠난 여름의 바다를 여기에서 다 만나고 가겠구나, 가혹했던 여름이지만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여름이 되겠구나.
시어머니가 떠나가셨고, 뒤이어 시아버지의 암 투병이 시작되었고, 우리에겐 아이가 찾아왔었지만 이내 아이를 잃었다. 가혹하기만 했던, 잃어가는 것만 있을 것 같던 우리의 여름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하려고 거제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다의 기억을 채집했다. 이 기억들이 우리의 상실을 덮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아직 남은 이 여름을, 더 오래도록 남길 수 있도록 이번 주말에도 떠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