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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할영 Aug 02. 2024

임신 바우처로 유산 보약을 지었다

처음으로 한약을 먹게 되었다

초기 유산이후 3주가 지났다. 상실감은 금방 회복이 되었지만, 몸은 쉽사리 돌아오지를 않는 것 같다. 남편의 다리가 다쳤었고, 어머님이 떠나가셨고, 아버님의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고, 아이가 왔다가 떠나갔던 우리의 여름은 서로의 마음은 어떻게든 다독이며 나아갈 수 있었지만 몸은 그 많은 일들을 결국 감당하기에는 어려웠나보다. 입술의 포진은 없어지질 않고, 다리는 매일 퉁퉁 부어서 저릴 만큼 아프고, 손가락의 한포진도 더 심해졌다. 마사지바로 몸을 문지르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림프절부터 모든 곳의 순환이 멈춘 것처럼 고장 난 것 같았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몸이 움직이기 힘들어지니 살이 내 인생의 최고 수치로 쪄버렸다.

임신을 했다는 안내를 병원에서 받으면 임신출산 바우처로 100만원이 지급되는데, 초기 유산을 겪은 우리는 그 바우처를 10만원도 채 쓰지 못했다. 우리처럼 유산의 경우에는 남은 바우처 금액을 이후의 임신 준비를 위해 영양제를 사 먹거나, 배란 체크 등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한의원에서 보약을 지어먹기도 한다. 엽산과 철분제는 자연배출을 위한 약을 처방 받았던 때부터 함께 사서 먹었는데, 몸에서는 즉각적인 변화가 크게 없어서 어떻게 하면 몸이 나아질 수 있는지 많은 검색을 하다 결국에는 한의원을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한의원을 잘 믿는 편이 아니었다. 한약에는 원재료가 어떤 것들이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을 뿐더러, 진맥만으로 그 사람의 몸 상태를 체크한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몸이 참 낫질 않으니 그 불신도 뒤틀리는지 어느새 '산후보약' 혹은 '유산 한약'을 검색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한의학의 효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양약으로도 못 잡던 통증이나 몸의 흐름을 한의학으로 잡았다는 사람들의 후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지금 나의 몸은, 흐름이 막혀버려서 길을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내 몸의 흐름이 스스로 잘 흘러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남편과 거제에서 가장 유명하고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다. '할아버지 원장님'께 꼭 진맥을 받아야 한다는 후기대로 우리는 원장님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진맥을 받았는데, 이곳 원장님은 진맥을 짚으면서 관상과 사주도 함께 보나 싶을 만큼 나의 성격과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성격이 참 좋은데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잘 흥분했다가 또 잘 가라앉을 거에요. 스스로도 많이 참고 있을 거라 몸이 스트레스를 잘 받겠습니다. 또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매사에 있어서 자기를 많이 몰아붙이지요?"


"좀 그런 편인 것 같아요."


"이만하면 나 참 잘 살고 있다고 나를 다독여주고 안아주세요. 나를 몰아붙이는 동안 나에게도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급한 마음이 몸에 아주 독이 될 거에요. 그러다 보면 화도 쌓여서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나를 미워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지금 몸에 화도 많고, 미움도 조금 있네요."


"지금 미워하는 사람은 딱히 없는데, 제가 모르는 새 생겼을 수도 있겠네요."


"얼마 전에 유산을 했으니 다음 아기에 대한 불안함도 있으실 거고, 그래서 몸도 많이 긴장 해 있어요. 3개월 정도 몸을 정비하고 다시 시도하면 좋겠습니다. 몸이 풀려야 건강한 아기도 오니까요. 스트레스로 염증이 많아진 찐득한 피를 맑게 흘러가도록 약을 지어볼게요. 지금은 스트레스 없이, 걱정이나 불안함 없이 지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제일 못 하는 건데, 노력 해 볼 게요."


10여분 간 심리 치료를 하듯이 이리저리 나의 성향과 내면을 들여다보던 원장님은 꼭 자신이 나아지게 해 주겠다는 말을 했다. 한의원을 믿기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말을 전심으로 다 믿지는 않았지만 나를 들여다봐주고 공감해준 그 마음이 감사했다. 서양 의학에서는 정량적인 지표가 확인되지 않으면 의사와 나눌 수 있는 말이 제한되는데, 이곳 한의원에서는 내 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것들이 나를 아프게 했는지 돌아볼 수 있던 것이 좋았다.


임신 바우처 잔액으로 먹을 수 있는 한약이 두 달치는 되었다. 평소라면 비싸서 먹지 못할 한약을 바우처 덕분에 먹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몸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다음에 찾아올 아기를 위해서도, 여러 일들을 함께 겪고 있는, 겪어 나갈 남편과 더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서도, 더 활기롭게 내가 살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갈 나를 위해서도. 내가 제일 하기 어려운 일, '아무 걱정 없이 나를 내버려 두기'. 그걸 해내야 나아진다니 비우는 연습을 해 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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