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야 말았다, 그것이
(‘거제에서 신혼을 보냅니다’ 브런치북 part 1과 이어집니다. part 1의 마지막 글은 아래에 있습니다. )
https://brunch.co.kr/@nyshiny/87
예고 없이 나를 찾아 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예측하지 못 하는 새에 오지만, 사실은 예견 되었던 것이어서 막을 수가 없이 찾아온다. 그것이 찾아오면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에 불타지만, 그 의지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에는 티비만 멍하니 바라보게 되곤 한다. 세상에 의미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하고 공허한 생각으로 나를 뒤덮게 만드는 그것. 그것이 내게도 오고야 말았다. 바로 ‘노잼시기’.
사실 이제는 안다. 내게 노잼시기가 찾아 오는 건 어느 정도 내 의지대로 모든 걸 제어할 수 없을 때에 온다는 것을. 그러니까 매여 있는 게 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걸 곧이곧대로 할 수 없을 때 찾아온다는 것을. 나는 꽤 자유롭게 살았었다. 어릴 때부터 원하는 건 다 하게 해 주시려는 부모님 덕분에 먹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모두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이라는 틀 안에서 원하는 건 다 해볼 수 있었다. 밤 늦게까지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었고,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가고 싶은 곳에 갔고,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면 시간을 쪼개어서 하기만 하면 되었다.
직장을 다니고 나서부터 내게는 ’평일‘과 ’주말‘이라는 개념이 확연해졌고, 평일에는 회사에 맞추어서 살아야하는 것은 당연했다. 업무시간을 지키는 것이 내 월급에 대한 전제 조건이니까. 내 시간이 직장에 매여 있게 된 대가로 돈을 벌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이따금씩 찾아오는 노잼시기를 맞이해야 했다. 다 재미 없어 보이고, 하고 싶은 것도 마땅히 없으며, 인간관계마저 회의적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억지로 버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기.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계속 미루다가 결국 더 받은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어 술이나 음식으로 풀게 되는 시기. 그때는 내 시간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으니 마음껏 놀러 가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해서 이 노잼시기가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고야 말았다. 이곳에 내려와서 살면서는 제법 시간이 생겼는데도 (인턴으로 일은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노잼시기는 나를 찾아오고 있다. 매일 바다를 보고 살고, 아침에 일어나면 바다와 산이 함께 있는 일출을 볼 수 있는 삶임에도, 남편과 매번 퇴근 후 무얼 먹을지 고민만 하면 되는 삶에도 노잼시기는 찾아오고야 말았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내게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나의 몸’이 문제였다. 작년에는 결혼 준비와 업무로 정신 없이 흘러갔고, 그 이후에는 여러 가정사로 인해 이곳 저곳을 오가는 생활을 했고, 지금 사는 곳에 적응하고 보니 올해가 반이 지나갔다. 이전에는 나를 챙길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할 여유가 있었지만 지난 2년 동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 동안 살도 많이 찌고, 매일 하던 운동도 하지 못하니 몸의 기능도 떨어졌으며, 혼자 하는 식사가 아니다 보니 이전만큼 몸을 생각하는 식사로 챙겨먹지 못했더니 나의 체력은 인생 최저로 내려온 것 같다. 지금은 운동을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어도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이 나의 활력이라 했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밥 먹고 나면 금세 누워 잠들어버리는 몸이 되었다. 그러니 지금의 노잼시기는 무얼 하겠다는 의지도 쉽게 불태울 수 없는, 어딜 다녀오면 쉽게 지쳐 미루게만 되는, 인간관계마저 힘드니 나중에 생각하자고 말하게 되는 체력 저하로 인해 온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좋은 건, 이런 노잼시기가 와도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내가 잘 극복해내리라는 것을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그 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다시 활력을 찾아왔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원인을 빠르게 알아내었으니, 고치기만 하면 다시 인생 꿀잼시기가 될 것이라는 것. 우선 살을 빼야 할 테니 움직여야 한다. 기력이 안 나면 산책부터 시작하면 된다. 나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
오늘 밤에는 남편에게 ’새로운 생활 지침‘을 세우자고 해야겠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우리가 오늘에서 내일로 나아가려면 지금 조금씩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체력을 더 잃기 전에 서로를 독려해서 지켜내면서 이 노잼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