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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할영 Aug 23. 2024

금요일에 만난 당신에게

어느 날의 편지


금요일이 지닌 설렘과 당신과의 기억 때문인지 금요일이면 왜인지 누군가와의 약속이 꼭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더라도, 일주일 중 5일을 회사에서 수고한 내게 스스로와의 약속이라도 지켜야 직성이 풀렸다.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을 금요일 퇴근 후에 무얼 할지 고민하는 설레는 마음을 지닌 채로. 토요일과 일요일보다 금요일 저녁이 더 기다려졌던 것은 주간의 업무를 잘 마친 데에 대한 해방감과 오늘 저녁을 잘 보내고 나서도 이틀 간의 휴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나머지 이틀을 어떻게 채워야 할 지에 대한 기대감이 금요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 금요일, 처음 만난 사람과 그 다음 주 금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 금요일 퇴근 후 무얼 하냐고 물었던 내게 당신은 별 일 없다고 말했고, 그럼 우리 동네에 놀러 오라는 나의 말에 당신은 그 동네는 처음이라 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난 우리는 꽁꽁 얼어 붙은 거리를 걷다 따끈한 오뎅바에 들어가 술 한 잔 기울이며 당신에게, 나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풀어나갔다. 그렇게 두 번의 금요일이 지나자 우리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이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금요일마다 장이 섰는데, 우리는 꽤나 이 금요일 장을 좋아했다. 퇴근 후 금요일 장에서 떡볶이와 튀김, 그리고 닭강정을 사고 난 뒤 편의점에서 그날 먹고 싶은 술과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서 만나곤 했다. 각자 손에 가득 든 먹을 것들을 접시에 담아내고 술잔까지 식탁에 멋드러지게 차려내고 나면, 꼭 그 식탁을 사진으로 남겼다. 매번 같은 메뉴일지라도, 그날의 마음들은 모두 제각기 다를 테니까. 그 두 번의 금요일 이후 7년이 흐른 당신과 나는, 이제는 굳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집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특별한 어느 날보다, 그 날의 소소한 행복을 맞이해가면서. 


당신과 함께 보내지 못하는 금요일이 오면, 당신은 내가 혼자서도 좋아하는 것을 하며 보내는 날이 되도록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예매해주곤 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각자의 시간도 소중히 해 주는 것이었다. 뭐든 '당연한' 것은 없도록 하자고 서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시간은 '당연히' 항상 나의 것인 것은 아니었고, 나의 시간도 그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서로를 더 애틋해할 수 있는 길이었던지도 모른다. 보고 싶던 영화를 혼자 보고 나올 때면 또 괜스레 그날의 흥에 취해 맥주 한 캔을 꺼내는 나에게, 당신은 '네가 행복하면 나는 다 좋아'라고 전화를 걸어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당신이어서 실로 고마웠다. 


자유분방하기 그지 없던 내가, 당신을 만나 '자유를 지향하는 편'으로 변화해간 까닭은 늘 당신이 하는 행동과 말에는 내가 주체였기 때문이었다. 매일을 금요일 밤처럼 놀고 싶어 하던 젊은 날의 나는, 인생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당신에 의해 점차 변해갔다. 조금 더 내 삶의 뿌리를 두껍게 만들어가는 쪽으로. '무얼 하든 네가 원하는 건 다 해보라'던 당신의 말은 나를 더 생각하게 만들었고, 어떤 것을 하고 싶어 하는지, 나는 무얼 좋아하는지 스스로에 대해 궁금해하게 만들었다. 설령 당신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할 지라도 최소한 나는 당신이 주는 사랑에 그렇게 보답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당신과 함께 살기로 한 후부터는 당신과의 이야기를 줄곧 써 왔다. 태생부터 마음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라 그런 줄로 알았건만, 따로 쓰겠다는 마음 없이도 애틋함이 절로 생겨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앞으로도 함께 하겠다는 확신이 있기 전까지는 오르락내리락 했던 마음이 표현되었다면, 확신이 선 후부터는 같이 하는 순간들을 시로 표현해내기 위해 여러 단어들을 수집하고, 감정들을 그러모았다. 설렘 대신 자리 잡은 편안함 속에서도 계속 피어나는 마음이 신기했다. 이 마음이 더 자라나길 멈춘다 해도 그때까지 성장한 마음으로 평생을 견뎌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금요일에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함께 얼어붙은 겨울밤을 거닐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과거에 대해 가정해보는 것이 가장 의미 없는 일인 줄을 알면서도 괜히 생각해본다. 당신은 내가 당신과 닿지 않았더라면 종종 불운이 찾아와 어둑해지는 자신의 길을 같이 거닐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라고 가끔 말한다. 후회하는 건 아니냐고도 덧붙여 묻는다. 그 물음이 미안함과 안쓰러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묻는 당신이 너무 슬프다고 잘라 말한다. 내게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마음의 파도가 여전히 요동치며 내가 뿌리 내릴 섬을 아직까지 찾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잘 모르겠다. 당신은 혼자서도 잘 뿌리 내리고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내가 없는 당신을 떠올려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있음으로 인해 행복해하는 모습만 생각해야겠다. 


파도 소리와 윤슬이 가득한 곳에서 당신과 살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앞으로 헤쳐나갈 미래들에서 우리가 끄집어낼 아름다운 시간들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라는 이름 안에서 어떤 것들을 조율해 갈지 이곳에서 함께 골몰해보자고. 서로에게 의지해야하는 이곳에서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다시 써 가자고. 밖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의 소중함을 알아가자고.


언제까지나 이 마음을 기억하고 살도록 처음 그 순간을, 그 금요일을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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