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은 한나라 전성기인 한 무제 때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문학자로, 기원전 145년경 오늘날의 중국 산시 성 한성시의 고문촌 용문채에서 태어났다. 황제 측근에서 각종 기록을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 담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20세를 전후해서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공안국과 동중서를 만났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여정에서 큰 이정표가 되었다. 특히 동중서를 통해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역사 유적지를 찾아 자유롭게 천하를 방랑했는데, 이는 훗날 <사기> 저술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황제의 경호원 격인 낭중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나이 36세 때 아버지 사마 담이 낙양에서 화병으로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계기로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대역 사서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 참혹한 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릉의 화’가 그것이다. 이 사건은 사마천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3년 후 사관 직인 태사령에 오른 그는 B.C. 99년 이능의 투항 사건을 맞아 홀로 이능 장군을 변호하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살이었다.
당시 사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돈 오십만 냥으로 감형받는 것과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섰지만 가난한 벼슬아치였던 사마천에게 벌금을 낼 돈은 없어 궁형을 택했다. 치욕적인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여 환관이 되었다.
궁형(宮刑)은 남자 생식기에 가해지는 형으로, 고환을 절개해 꺼내고 사정관을 없애 남자 구실을 못하도록 만들었다. 궁(宮)에서 내시들에게 행해지던 것으로, 상처가 아물 때 썩은 내가 난다 하여 부형(腐刑)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이 당하는 모욕 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2 년 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옥중의 경험을 통해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궁형을 받고 2년 후, 한무제는 그에게 사면령을 내렸고, 중서령(中書令)이란 직위에 봉했다. 이는 황제의 후궁들을 보좌하는 일종의 비서직으로 거세를 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마천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궁궐 내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각종 사료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모든 자료들을 모은 후 은퇴하여 《중국 통사》 집필에 들어갔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장 52만 6,500여 자에 달하는 대기록으로 본기(本記) 12권, 서(書) 8권, 표(表) 10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총 130권에 달하는 역작이었다. 옛 신화시대부터 전한 초기인 기원전 2세기 말 한무제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본래 명칭은 <태사 공기(太史公記)>였으나 후한 말기에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의문을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승화시킨 <사기(史記)>의 완성은 그에게 있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나날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울분을 누르고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 운명의 비극을 통찰함으로써 ‘역사를 재창조한 역사가’가 되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 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기>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담은 공자의 <춘추>를 계승한 책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