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느라 복사뼈가 세번내려앉고 이가 몽창 빠진 작가!

혼독 - 혼자라면, 읽을 때다 18

by 리치보이 richboy

2부. 혼자라면, 읽을 때다


18. 시공간의 제약을 기회로 만든 죄수의 혼독



유배지로 간 죄수의 독서 - 다산 정약용



중국의 제일가는 독서가를 꼽으라면 북송의 정치가이며 문학가요 사상가인 왕안석(1021-1086)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독서의 이로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으며, 만 배의 이로움이 있고, 사람들의 재능을 밝혀주고, 군자의 지혜를 더해주기도 한다. 어리석은 자는 독서함으로써 현명함을 얻고, 현명한 자는 독서함으로써 이로움을 얻는다. 독서를 해서 영화로워지는 것은 보았지만 독서 때문에 해를 입는 것은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여 부디 독서하기를 권하노니 좋은 책의 내용을 마음 깊이 새겨 두기를 바라노라.”


우리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위대한 학자는 18세기 조선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은 관직에 있을 때나 유배생활 중일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쉬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다산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있는 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 모두 합쳐봐야 5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리고 책 읽기야말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이자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다산은 굳게 믿었고 실천했다.


머리가 너무나 뛰어나서 주위에 적이 많았고 끝없는 모함으로 시달린 정약용이었지만, 정조는 정약용이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끝까지 그를 중용하려 하였다. 책을 좋아하는 정조였지만, 때로 책보다도 정약용과의 대화를 더 좋아하였다.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사랑은 너무나 극진하여 주위에서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군계일학(群鷄一鶴) 같은 인재라며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은 그 이유로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정조가 죽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다산은 죽음의 칼바람에 당하고 말았다. 정조가 죽자마자 일어난 신유사옥으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다산은 남쪽 바닷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처음 유배지에 왔을 때, 다산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몸의 왼쪽이 거의 마비되어 한동안 거동할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얼굴도 반쪽이 굳어 입가에 침이 고여 흘렀고, 혀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또박또박 말할 수도 없었다.

다산은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에 머물며 더 이상 자신을 알아줄 임금도 없고 집안의 형제들은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갔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담한 일은 자기 때문에 자식들의 앞길까지 막혔다는 사실에 심하게 좌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팠던 조금씩 몸이 회복되자, 다산은 자신의 유배형에 대해 상심하고 좌절하기에 앞서 ‘그동안 바쁜 벼슬살이 때문에 맘껏 하지 못했던 독서와 글쓰기를 재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며 몸을 추슬렀다.

다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배지에서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독서’만이 자신을 지키고 자신들의 앞날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했다.


1801년 11월부터 유배형이 풀리는 1818년 8월까지 대략 18년간의 유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강진에 도착한 다음 해부터 다산은 아침부터 밤까지 건강을 해칠 정도로 공부와 저술에 매진했다. 외로운 처지에 의지할 만한 일은 그저 읽고 쓰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래도록 한자리에 앉아 저술과 독서에 매달렸던지 다산의 복사뼈는 세 번이나 내려앉고 이가 다 빠져버렸다. 그럼에도 다산은 손에서 책과 붓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


정약용의 독서는 당시 조선 사회의 성리학처럼 탁상공론식의 독서가 아니었다. 그의 독서는 현실 개혁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이루어졌다. 그는 항상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떤 방법이 좋을까’ ‘다 함께 잘 사는 길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독서를 했다.

이 같은 다산의 독서는 당시의 성리학과는 달리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행동을 중시했고, 실제적인 것을 중시했다. 그림의 떡 같은 학문이 아니라, 당장 집어먹을 수 있는 떡과 같은 책을 찾아 읽고, 또 자신이 읽고 깨달은 바 역시 떡을 빚어내듯 책을 썼다.


독서가 독서로 그쳐서는 안 되며, 독서하고 연구한 것이 인간의 삶과 생활을 더욱 풍성하고 유익하게 변화시킬 때에만 독서의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다산. 그가 어느 정도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독서를 강조했는지는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둘째 아들이 닭을 기르는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네가 양계를 시작하였다고 들었다. 양계란, 참으로 좋은 일이기는 하다만 이것에도 품위 있는 것과 비천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느니라. 농서를 잘 읽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아라. 색깔을 나누어서 길러도 보고,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보면서 다른 집 닭보다 살찌고 알도 잘 낳을 수 있도록 길러야 하느니라.

따로는 닭의 모습을 시로 지어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 보아야 하느니, 이것이야말로 책을 읽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양계니라. (중략) 너는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내어 책을 하나 만든다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닭을 기르는 양계(養鷄)도 책을 읽고 하고, 직접 양계한 결과도 책으로 쓰라는 다산, 그의 독서야말로 문약(文弱)에 빠지지 않는 실천적 행동력을 지닌 독서였다. 또한 정약용이 얼마나 독서를 중요시했는가는 유배지에서 그의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정약용은 6남 3녀의 자녀를 낳았지만 다 요절하고 두 아들 학연, 학우와 딸 효정만 남았다. 아비 없이 힘겹게 살아갈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였지만, 내용 속에 한결같은 당부의 말은 ‘독서하라’ 뿐이었다. 그는 특히 망한 집안의 자손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독서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편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 잇는 사물 중에는 자연 상태로 존재하여 좋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은 오히려 기이하다고 떠들썩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파손된 것이나 찢어진 것을 가지고 어루만지고 다듬어 완전하게 만들어야만 그 공덕을 바야흐로 찬탄할 수 있듯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서 살려야 훌륭한 의원이라 부르고 위태로운 성을 구해내야 이름난 장수라 일컫는다. 명문 집안 고관들의 자제들처럼 좋은 옷과 멋진 모자를 쓰고 다니며 집안 이름을 자랑하는 것은 못난 자 조차도 다할 수 있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되지 않겠느냐? 폐족(廢族, 망한 집안)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중략) 의원(醫員)이 삼대를 계속해 오지 않았으면 그가 주는 약을 먹지 않는 것 같이 반드시 몇 대를 내려가면서 글을 읽는 집안이라야 문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독서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굳은 정신력과 철저한 이해를 강조하였다.



“무릇 남자가 독서하는 행실을 닦으며 집안일을 보살필 때는 응당 거기에 전념해야 하는데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만 근면하고 민첩할 수가 있고, 지혜가 생길 수 있고, 업적도 세울 수가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 내가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깨달은 바가 무척 많은데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 내리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릇 독서할 때도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수백 가지의 책을 함께 보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읽어야 읽은 책의 의미와 이치를 훤히 꿰뚫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 점 깊이 명심해야 한다.”



심지어 정약용은 아들들이 자신의 저서를 읽는 것이 아비를 살리는 셈이라며 독서를 강권했다.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 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아갈 것으로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 문득 한 구절이나 한 편 정도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났을 때 다만 혼자서 읊조리거나 감상하다가 이윽고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희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다 여기는데 너희들 생각은 독서에서 이미 멀리 떨어져 나가서 문자를 쓸데없는 물건 보듯 하는구나.

쏜살같은 세월에 몇 년이 지나면 나이 들어 신체가 장대해지고 수염만 터부룩해질 텐데 갑자기 얼굴을 대면한다 해도 밉상스러울 뿐 아버지의 책을 읽으려고나 하겠느냐.


너희들이 참으로 독서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저서가 쓸모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 가서 병이 날 것이고, 이 병은 고칠 수 있는 약도 없을 것인즉, 너희들의 독서는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이치를 생각해 보거라."



유배 중 정약용은 외가에서 책을 얻어다가 읽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이다. 강진은 해남에서 멀지 않은 곳이므로, 정약용은 외가에서 많은 책을 가져다 읽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다. 유배 16년째, 추사 김정희가 다산 초당으로 찾아왔다. 글과 글씨의 당대 제일의 두 대가가 만난 것이다. 김정희는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 초간본을 읽고 다산의 제자가 되어 그곳에 2개월간 머물며 ‘다산 초당’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서 걸어놓고 갔다.


회갑을 맞은 해까지 다산이 펴낸 연구서가 경서에 관한 것이 232권, 경세론을 포함한 기타 문집이 260여 권에 달했다. 그 이후에도 계속된 저술활동으로 다산은 최종적으로 500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 <목민심서>는 정치인들의 필독서이며, <경세유표>는 총체적인 국가 경영 전략서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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