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는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감형되어 1988년 8월 15일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는데, 복역한 지 20년 20일 만이었다.
그의 대표 저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인데 수감생활을 하면서 교도소로부터 받는 봉함엽서에 빼곡히 쓴 편지들을 엮은 책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두 종류로 출간되었는데, 그중 실제 그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들을 그대로 모은 영인본 <엽서>를 살펴보면 그의 모든 편지 한 장 한 장에 글씨 하나 틀린 게 없고, 사이사이에 직접 그린 그림까지 담겨 있어 마치 서화작품 같아서 과연 감옥에서 쓴 글인가 모두 놀라게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김정운 교수는 <남자의 물건>에서 신영복 교수에게 ‘어떻게 글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글을 쓸 수가 있는가?’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한 달 내내 모두 다 수정해서 거의 원고를 암기한 수준에서 쓰는 거니까. 그때는 또 20대, 30대 초반이니까 머리도 좋아서 다 암기하고. 그래서 이번 달에는 이 문제에 대해 쓰자, 다음 달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쓰자 하고 한 달 내내 생각을 쭉 정리해요. 그런데 이걸 어디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강물같이 흘러갈 것 같아서, 전혀 집필이 허용되는 상황이 아니니까, 뭐 그래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간에 다 쓴 거지요.”
신영복 교수는 한 달에 한 번 허락된 편지 쓰기를 위해 한 달 내내 써야 할 글을 머릿속으로 쓰고 고치기를 반복해 아예 잘 써 놓은 한 편의 서간문을 외워 쓴 것이었다. 한편 그는 교도소 내 교화 프로그램 중 하나인 서도반에 들어가 잡다한 붓글씨 노역을 하며 할아버지에게 배운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한국 서예계의 전설이자 추사의 전통을 잇는 정향 선생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면회를 통해 무려 7년 동안 본격적인 붓글씨를 배워 자신만의 한글 서체를 개발하기도 했다(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의 로고가 그의 글씨다). 그뿐 아니라 신영복의 옥중서한의 펜글씨는 국민대학교 김 민 교수에 의해 ‘엽서체’라는 아름다운 폰트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다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무기수가 20년을 한결 같이 아름다운 서화작품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 김정운의 질문에 신영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분히 그런 질문이 가능한데요. 유기 직영, 소위 말하는 2,3년 후에 출소하는 단기수들 하고 무기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어요. 단기수들에게 징역이란 빨리 끝나면 좋을 시간이죠.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 오로지 출소만 생각해요. 반면 무기수는 출소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뭔가 살아갈 의미가 있어야 해요.
결과적으로 인생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 해요. 삶 자체가 과정이 아름다워야 하고, 뭔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깨달음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아마 무기수라는 어쩌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열어주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미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현재, 바로 이곳 이 순간을 위해 사는 것이란 걸 배운다.
- 빅터 프랭클
저술가이며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체포되어 잔인한 죽음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기나긴 죄수 생활을 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육체와 정신이 벌거벗은 맨몸뚱이인 인간 그대로의 실존(實存)을 발견한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그리고 그의 아내 등은 이미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당했거나 가스 처형실로 보내졌다. 누이만을 제외하고 온 가족은 강제수용소에서 몰살을 당하고 만 셈이었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모든 가치가 파괴되고 추위와 굶주림, 잔혹함, 시시각각 다가오는 몰살의 공포에 떨면서 벌거숭이인 그는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렇게라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정확한 통계를 통해서도 입증되었지만 당시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스물여덟 중에 한 명도 채 안 되었다. 내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외투 안에 숨겨진 내 첫 번째 책의 원고를 구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따라서 나는 내 정신적 자식을 잃는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해야 했다.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육신의 자식은 물론 정신의 자식(원고)도!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내 삶이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체포되면서 빼앗긴 책의 원고 대신 나치로부터 물려받은 외투 주머니에서 히브리 기도책의 찢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대교의 기도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셰마 이스라엘이었다. 그 기도문의 내용은 프랭크에게 '종이에 적지만 말고, 그대로 살라'는 계시처럼 느껴졌다.
프랭클은 곧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정신적 자식을 되찾는 것, 즉 잃어버린 책 원고를 다시 쓰는 일을 ‘살아야 할 이유’로 삼았다.
그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수용소의 하루를 견디며 매일 밤 몇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글을 새로 썼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소독실에서 껌종이만 한 작은 종이조각에 책의 요점이 되는 단어들을 속기로 적으며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억겁의 세월 같았던 시간들이 지난 후 독일이 마침내 패함과 동시에 아우슈비츠 감옥의 정문은 열렸고, 빅터 프랭클은 비로소 해방되었다.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굴뚝의 연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결국 자신만 홀로 살아남았다. 누군가가 살린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의지 하나로 살아남은 것이다. 맨몸뚱이의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한 문장의 깨달음이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이후 빅터 프랭클은 대표작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다. 이 책은 그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자서전적인 체험 수기로 그 체험을 바탕으로 프랭클 박사는 자신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이룩했다.
이 밖에 <삶의 의미를 찾아서>등 서른 한 권의 저작을 남긴 빅터 프랭클은 1997년 빈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20세기 유럽사의 한 복판을 관통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은 없다 ‘는 진리를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 그는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의해서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3년간 수용되었다가 극적으로 생화에 성공한 빅터 프랭클 박사의 수용소 생활에 관한 것이다. 내일 끌려가서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수용소에서 어떻게 책을 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바로 내일 죽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구상하였던 책을 쓰려고 결심하는 것은 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강한가를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몰래 몽당연필과 종이를 구한 다음 자신이 남기고 떠나야 할 책의 집필 작업을 계속했다. 빅터 프랭클이 마지막으로 남긴 회고록 성격의 책인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에서는 수용소에서 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잃어버린 초고를 다시 써야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발진티푸스를 앓았을 때 독혈증을 이겨내기 위해서 밤마다 뜬눈으로 지새우기 시작하면서 그런 마음을 먹었다. 마흔 살 생일에 동료가 몽당연필과 두어 장의 아주 작은 친위대 서식 용지를 어디선가 구해서 선물했다. 나는 용지 뒷면에 몹시 들뜬 마음으로 마치 속기를 하듯 떠오르는 생각들을 끄적거렸다.”
내일 끌려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행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것을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일 뿐, 그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를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이럴 때 인간은 자신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