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제자리
자신의 결점과 무지, 실수와 비겁함이
아이들의 영혼에 새겨질 것이라는 생각은
또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가!
책 _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 중에서
솔이방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 들이며
머리핀이며
침대 위에 쌓인 옷가지들이며
바닥에는 어제 입은 옷들이 허물처럼 나뒹굴고
뒤집어진 양말은 숨은그림찾기 하듯
한 귀퉁이에서 꼼짝을 않는다.
남편과 나의 무의식과 나태의 한 조각이
딸아이의 방 안에 고스란히 모여
' 이것 봐라, 나라는 훔쳐도 씨도둑 질은 못한다고'
그 엄빠의 그 딸이다.
그렇게 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당장에 내 옷 방엔 운동복과 잠옷들이
한 번 입은 옷과 한 번만 더 입고 빨 옷들이
켜켜이 쌓여있고
겨울 장갑과 여름 모자가
새로 산 스카프와 속옷들이
빈틈없이 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당장 남편 책상엔 며칠분의 종이신문들이
선거공약 안내장들이
양말과 넥워머가
구두 주먹과 리모컨이
두루마리 휴지와 이면지들이
빈틈없이 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러면서 내가 잔소리를 해댔었구나.
정리의 첫 번째는 '제자리'라며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댔었구나.
제자리의 '제' 자도 모르면서.
그런 마음이 들자
솔이방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열심히 푼 문제집들도 꺼내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한 데 모아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내 눈엔 다 푼 문제집들이지만
솔이에겐 한 달 내내 애쓴 흔적이자 보람이라
'버리기'가 눈치가 보였는데
마침 학교 간 이때 몰래 갖다 버리자 싶어
부지런을 떨며 분리수거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분주한 주말을 보낸 일요일 오후
다음 주 학교 갈 준비를 하며
한자 문제집과 수학 문제집을 찾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단다.
솔이 방에 수납공간이라는 게
책상과 책장, 그리고 각각의 가방들뿐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혹시나 싶어 남편방에도 가보고
안방에도 가보고
윤성이 장난감 방, 베란다까지 뒤져도
나올 생각이 없다.
마지막 숙제 검사를 내가 해줬으니
학교에서 안 가져온 건 아닐 테고
집 어디에도 없다는 건
설마, 설마 ...
무거운 책 더미를 안고
분리수거장을 향했다가
홀가분하게 돌아온 내 발걸음이
스친다.
아마, 아니 분명 그 책 더미 사이에
솔이의 8급 한자 문제집이 있고
4월 팩토 문제집이 있다.
나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으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목소리도 가다듬고
솔이에게 말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엄마가 솔 이방 청소를 하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렸는데
실수로 그 사이에 한자와 수학 문제집이
같이 들어간 것 같다고.
정말 다행인 건
우리 아파트는 고맙게도 한 주의 재활용 쓰레기는
다음 주 월요일에 수거해가니
지금 가서 찾으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외출하고 돌아와 차에서 짐을 나르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해 지금 당장 분리수거장으로
가라고 말했다.
가서 좀 찾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당장 뛰어가라고 소리친 듯
다급했다.
그렇게 남편과 솔이가
한참 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솔이는 아주 단호한 표정과 몸짓으로
한자책과 수학 책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엄마, 내 한자 노트까지 버렸더라?'
뭐 쓰레기가 많아서 찾기가 어려웠다든지
이걸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든지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라든지
뭐 이런 엄마의 얼어붙은 마음을 풀어줄
말 한마디 없이 ㅋㅋㅋ
한자 노트라는 여죄를 붙여
엄마를 책망하는 눈빛과 단호함으로
나를 케이오 시켰다.
유구무언이라.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고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로 떨구게 된다.
미안하다 딸아.
어질러진 솔이방을 보며
날 닮은 솔이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잔소리를 해댔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다 쓸어버리고
다시 잘 정리된 방으로
다시 잘 정돈된 삶으로
다시 '제자리'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혼자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도 여전히 완벽하지 못하다.
어쩌면 그런 인생은 내게 없을 수도 있겠다.
딸아이에게 전할 빈틈없는 잔소리가
더 이상 안 먹힐 수도 있겠다.
난 이미 딸아이에게 언행불일치다.
힝
그런데도 요상하게 기분이 좋고
히죽히죽 웃음이 나는 건
나를 쏘아보며 한자책을 끌어안은
딸아이의 단호함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본다.
딸아, 너는 할 수 있어.
모두 제자리, 모두 제자리
모두 모두 제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