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닭뼈, 낮에 먹다 남은 수박을 음식물 쓰레기 통에 담으며 생각했다. 해야만 하는 일들만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금요일. 금요일이 뭐 특별하다고 금요일 저녁만 되면 육아도 집안일도 헤 _ 긴장이 풀린다. 오늘은 저녁밥도 따로 안 하고 솔이 배고파하면 햇반 하나 데워줘야지 마음먹고 있었다. 뒤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밥 안 했다고 말하자 남편은 내가 예상한 대로 '닭 한 마리 부를까?' 묻는다. 그리고 사이드로 소시지 세트도 시켜도 되냐고 묻길래 세상 마음 좋은 아내처럼 그런 거 묻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음 다 시키라고 말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모여 닭을 뜯었다. 배가 고팠는지 솔이도 제자리에서 야무지게 닭다리를 물고 있고 남편도 기분이 좋은지 맥주 한 캔을 가져와 분위기가 하하 호호하다. 솔이가 어지른 거실을 대충 치우고 바운서에 누워있는 뚜뚜 손에 치발기 하나를 건네주고 나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나도 한 잔 줘'
그렇다. 이제 모유수유를 하지 않는다. 한 2주쯤 되었다. 원래도 양이 없었는데 요가 지도자 과정 듣는다고 일요일마다 온종일 물리지도 않고 유축도 안 했더니 젖이 저절로 말라버렸다. 언제부턴가 양이 너무 줄었다는 걸 느껴 딸꾹질을 해도 물릴 엄두가 안 났다. 그런 몇몇 날들이 지나자 정말 없어져 버렸다. 나도 이제 완분의 길을 걷는다. 그러니 맥주 한 잔쯤이야.
맛이 좋다. 맥주도 달고 갓 튀긴 통닭도 맛이 좋다. 덩달아 기분도 좋다. 오늘은 오전부터 일이 많았다. 보일러가 고장 나 3일째 애들을 씻기지 못했고 나도 씻어도 씻는 것 같지가 않았다. 삼일째 되는 오늘 오전 보일러를 교체했고 서둘러 애들을 씻기고 먹이고 또 다른 집 돈 문제며 전화할 일이 많아서 뚜뚜 보느라 솔이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까 닭 먹으며 솔이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멀티태스킹에 정말 약한 사람이다. 세상 예민한데 세상 단순해서 하나라도 늘면 금방 고장이 난다. 그래서 솔이한테 제일 미안하다. 그 정신없음이 고스란히 솔이에게 전해진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마시는 맥주, 거의 2년 만에 맘 편히 마시는 맥주_ 이렇게 달구나.
그 달콤한 맥주도 배고프다고, 졸리다고 보채는 뚜뚜 앞에서는 김이 빠진다. 닭을 뜯다 말고 뚜뚜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한 시간 만에 다시 돌아와 식어버린 닭, 소시지 그리고 김이 빠져도 달콤한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너무 나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자고, 자책하지 말자고, 부족해도 부족한 것만 생각하지 말자고.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_ 우연히 인스타에서 세바시 강연 영상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글 쓰는 사람, 헤엄 출판사 대표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 작가의 강연.
이런 사람도 있구나, 글 쓰는 일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신선한 충격에 휩싸여 한참을 이슬아 작가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저토록 단단해지는구나 _ 그런 식상한 결론에 다다르자 서둘러 닭뼈를 모으며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러 가기 위해. 한 동안 어떻게 하면 돈을 벌지? 요가를 어떻게 하면 더 잘하게 되지? 이 두 가지 생각만 주야장천 하면서도 즐겁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는데 그래 그게 다 글을 쓰지 않아서였어 라는 말을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 설거지는 내일 아침 남편이 몫으로 남겨둬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바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아야지 마음먹었다.
그런데 싱크대에 그릇을 옮기다 보니, 뚜뚜 치발기들도 보이고 다 먹은 젖병들도 보인다. 차마 이것마저 지나칠 순 없어 따뜻한 물도 나오는데 금방 해버리자 마음먹고 딱 그것만 씻고 이 자리에 앉았다. 젖병소독기 불빛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이제 글을 쓸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요즘 내 삶은 정말 기록해둘 만한 에피소드들이 참 많은 시기이다. 또다시 격정적인 육아와 자아분열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모든 게 다 엉망이랄까? 몸도 마음도 너무 바쁜데 그 어떤 것도 편할 날이 없는데 그래도 늘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날들이다. 그래서 육퇴를 하고 애들이랑 같이 잠들어 버리면 하루가 너무 아까울까 봐 늘 애들 재우고 나와 물구나무를 선다. 낮에 물구나무를 선 날이면 글을 적던지 책을 읽던지 해야 하는 요가 공부나 돈벌이 공부를 한다. 그렇게라도 나만의 시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맛보고 나서야 하루를 끝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금 나 자신에 대한 힘이 생기고 나면 운동도 더 하고 싶고 글도 더 적고 싶어 새벽녘이 돼서야 잠자리에 든다. 이제 그럴 나이도 지났는데 늘 그런 날들의 반복이다. 그러면 새벽부터 뚜뚜, 이른 아침부터 솔이까지 셋이서 또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되고. 수면시간은 줄고, 체력은 고갈되고, 육아의 질은 낮아만 진다.
오늘 아침엔 뚜뚜 첫 낮잠 재우고 나와 솔이와 놀아줘야 하는데, 아침밥도 차려줘야 하는데 하는데 하는데, 눈이 자꾸 감긴다. 몸이 자꾸 깔린다. 그런 나를 꼬집고 할퀴고 머리를 잡아당기는 솔이를 보고 있으면서도 눈이 감긴다. 솔이는 뚜뚜 잠들기만을 기다렸는데 엄마는 그 마음도 몰라주고 놀아주지도 않으니 보통 심술이 난 게 아니다. 그러곤 말한다. '게으름뱅이처럼 누워만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아, 이 얼마나 엉망인 하루의 시작인가 _ 이걸 기록하며 다시 글을 쓰자고 마음먹는다. 오늘 중 제일 기분이 좋은 순간이다. 기록하는 순간, 글 쓰는 시간. 그리고 오늘은 12시를 넘기지 않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 휴대폰 충전해놓고 바로 자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