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그때 사줄걸 뭐하러 합리적인 소비니, 똑똑한 소비니,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되니 잔소리해가며 솔이 기운만 뺏을까.
지난주 목요일엔 가까운 아웃렛에 다녀왔다. 이케아에 잠시 들린다고 갔는데 가는 길에 아동복 매장을 지나다가 그 원피스를 마주했다. 딱 보는 순간 '이거 우리 솔이 입히면 너무 예쁘겠다' 생각하며 솔이에게 말했더니, 매장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솔이가 말했다. ' 나 이 원피스 너무 마음에 들어 사줘'
뭐 안 사줄 생각도 아니었다. 그런데 요 나이 때 애들이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사달라고 하니 좀 둘러보고 더 사고 싶은 게 있을지 모르니 좀 기다려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솔이는 그 옷가게 매장을 나오자마자 원피스 사달라는 말만 했다.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서도 그 원피스 생각 때문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걸 입으면 너무 예뻐서 정말 기쁠 거 같다, 꼭 사주면 안 되냐 등등 말도 어찌나 이쁘게 졸라대는지 그 모습이 귀여워 허허 웃으며 알겠다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밥 먹고도 그 원피스 생각이 나면 일단 다시 한번 가보자고.
그런데 솔이는 전에 없이 끈질기게 졸라댔다. 그런 애가 아닌 데가 아니라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솔이는 어떤 물건이 갖고 싶거나 너무 좋으면 대체로 우리 부부가 조건 없이 사주기도 했고, 솔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불만 없이 그런 날들을 보내기도 했던 거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조금 있다 다시 생각해보자, 가격대가 좀 있으니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조금 더 저렴하게 바로 주문해주겠다. 내일이면 올 테니 하룻밤만 기다려보자 등등 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한 거 같은데도 솔이는 뒤돌아서면 원피스 또 뒤돌아서면 원피스 노래를 불러댔다.
그 원피스가 솔이를 홀려버렸다.
이케아에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조명 아래에서도 원피스, 어린이 침대를 지날 때도 원피스, 기차 장난감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보면서도 원피스 이야기만 해댔다. 다행히 식당에 가서는 원피스를 까먹었는지 곧잘 뚜뚜랑 놀고 밥도 잘 먹었다. 그동안 너무 집에만 있다가 이렇게라도 나오니 나오길 참 잘했다 그 생각에 흐뭇해했는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순간 솔이는 다시 원피스 노래를 불렀다. 멘트도 너무 간결하고 진심이 담겨 뭐라 핑곗거리도 댈 수 없이 원피스 노래를 해댔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원피스가 너무 비싸 보였기 때문에 당장에 사기가 망설여졌던 게 사실이다. 베네통 키즈 원피스였는데 지난겨울 이월 상품을 인터넷으로 살 때도 6만 원 가까이 줬으니 봄 신상이라는 그 빨간 세일러복은 더 비싸겠지? 지금 쯤이면 이월된 겨울 외투도 그 정도 값이면 살 텐데, 아직 방학이라 입고 어디 나갈 데도 없을 텐데, 애들 크는 건 한 순간인데 이 돈을 또 써야 될까 이 생각을 주로 했는데 솔이에겐 다른 말을 하며 솔이랑 신경전을 벌였다.
합리적인 소비가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할까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는데 그때는 그 말만 계속했다. 인터넷으로 사면 똑같은 옷을 조금 더 저렴하게 사고 또 요즘은 택배도 빨리 오니 조금만 더 기다리자며 주차장까지 왔을 때, 솔이는 한 껏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사달라고 하는데 도대체 왜 안되냐고 ' 원피스 살 생각에 기분 좋았는데 도대체 왜 안 사주냐고 _ 어른처럼 말했다. 왜 사줄 거처럼 해놓고 내 마음을 들쑤셔놓았냐 뭐 그렇게 들렸다. 그때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이미 베네통을 지나쳐 주차장까지 온 마당에 다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네이버 페이로 내 나름의 최저가를 찾아 주문을 했다.
오늘 늦은 오후 문 앞에 택배가 와있다. 그 택배 봉지를 끌어안고 웃어대는 솔이의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솔이가 좋아하니 좋기도 했고 저렴하게 잘 샀다 생각하니 그것도 좋았다. 입혀놓고 보니 찰떡이다. 이건 홀릴만한 원피스다. 이건 솔이를 위해 만들어진 원피스다. 내가 낳았지만 어쩜 이리 옴팡지고 야무지고 여문 똥강아지가 있을까 이뻐 죽겠다 싶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허니도 너무 잘 샀다고 빙글빙글 돌 아대는 솔이를 보고 우리 부부는 감출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이를 다 들어내 놓고 솔이의 행복에 감탄한다.
그런데 치마가 조금 짧다. 이럴 수가.
상체 품이랑 팔 길이는 딱 맞는데 치마 길이가 짧다. 솔이는 작년 초에도 올해 초에도, 자고 있는 지금도 가파르게 성장 중이다. 정말 나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키가 빨리 자란다. 그것도 다리가 쭉쭉 길어진다.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작년 가을에 산 베네통 원피스와 같은 사이즈를 샀는데 이렇게 짤롬해 보일 수가. 이럴 수가.
남편은 교환을 하면 좋겠다 하지만 솔이는 벗을 생각이 없고 이미 몸과 하나가 되어있다. 내일 입고 나갈 생각에 저리 웃어대는데 그걸 한 치수 큰 걸로 바꾸겠다고 벗길 엄두가 안 난다. 뭐 크게 입히는 것보다 딱 맞게 이쁘게 입히면 되지 하면서도 저 비싼 옷을 한 철만 입히고 내년에 못 입는다니 아까워 웃다가도 멈칫하게 된다.
그래도 뭐 좋으면 됐다 싶어 다 잊고 저녁을 보냈다. 자기 전에 책을 읽고 맨 뒷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솔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솔이가 그렇게 사달라고 할 때 매장에서 사 줄걸, 입어보고 예쁜 사이즈에 기분 좋게 나올걸 엄마 후회하고 있다고. 지금도 예쁘긴 한데 돈 몇 천 원 아끼자고 솔이 서운하게 한 것도 미안하고 그렇게 산 옷이 저렇게 딱 맞으니(교복도 아닌데 자꾸 접어 입히려고 하는 나를 발견) 엄마가 괜한 고집을 피웠나 싶다고 고백했다.
내 말을 들은 솔이는 고개도 한 번 안 들고 말했다. 그렇지, 내 말이 맞지? 그때 사주지 그랬어.
그래서 다음부터는 솔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옷이 있으면 꼭 매장에서 입어보고 기분 좋게 사 오자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솔이에게 어설픈 핑계를 대면서 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 옷은 정말 너무 비싸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