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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Feb 22. 2020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부부 한의사의 비극을 접하고 쓰는 글

사람이 죽었다. 투신자살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집에서 반듯히 누운 채 죽었다. 목 졸린 흔적이 있었다. 두 아이는 각각 5살, 1살이었다. 병원을 개원했는데 경영상 어려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네 명의 목숨 위로 유서 8장이 놓였다. 


한의사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많은 글이 올라왔다. 신원을 알고 싶어 하는 댓글. 죽은 이를 애도하는 댓글. 가열찬 비판을 하는 댓글. 하나의 현상에 수많은 주석.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글이 올라왔다. '살인자의 명복을 뭐하러 빌어주냐'는 글이 뒤를 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임을 당한 자도 말이 없다. 살아있는 자만 죽은 자를 말한다. 죽음은 굉장히 무겁고, 말은 무척 가볍다. 먼지처럼 명멸하는 말이 죽음을 다시 들어 올릴 수는 없다. 사건에 대한 무수한 억측과 비판은 시간과 함께 스러질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병원을 개원했다. 곧 어려움에 부닥쳤다. 네 글자. 경영 악화. 직원보다 월급이 적은 원장. 아무개 선배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었다. 7월이었던가. 500만 원 적자가 났다. 이상하게도 힘들지 않았다. 바닥을 치면 올라온다고 그 누가 얘기하지 않았던가? 그 말에 힘이 났다. 8월에는 올랐다. 마이너스는 아니다.


3만 원. 단순 명료한 숫자에 눈이 시렸다. 3초간 멍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을 나도 몰랐다. 익숙한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꺽. 눈물이 흘렀다. 아, 눈물은 참으로 자연스럽구나. 감정에는 노력이 필요 없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가 아니다. 눈물을 타고났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희망찬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목을 매거나, 물에 빠지거나, 손목을 긋거나, 음독하거나 기찻길로 뛰어들거나, 연탄불을 피우거나, 옥상에 올라간다. 밤이니까 나는 힘들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나아지겠지. 아침 해가 떴습니다. 그런데 달라지는 게 없다. 아, 밤이라서 힘든 게 아니구나. 전쟁 포로들이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자살을 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와이프 생각이 났다. 이런 말을 했다. 고민 끝에 페이닥터를 그만둔 때였을게다. "걱정하지 마요. 당신이 일 안 해도 먹여 살릴 능력 돼요." 


전화를 걸었다. 들썩이는 몸을 추스르며 3만 원을 벌었다고 전했다. 가만히 듣던 와이프가 말했다.

"집으로 와요!" 


눈물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병원 문을 나섰다. 플랜 B가 있었구나. 희망찬 발걸음은 아니었다. 다만 갈 곳 잃은 걸음도 아니었다.  


동양화에는 여백이 있다. 빈틈없이 채우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겠다. 그려진 게 전부가 아니구나. 그 날 비워놓았던 내 도화지의 여백. 


목동에 살았던 그 남자에게 여백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5살, 1살짜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부질없는 말이 죽음을 논하고 있다. 알고 있다. 그래도 만약 누군가 빈틈없는 정물화 속에서 압사당할 처지라면? 작은 여백을 가졌던 나를 보라. 티끌만큼이라도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라.   

(2020.2)







# 참고 : 자살 원인 및 수단별 현황, 221p, 2018년 경찰 통계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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